[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왕의 얼굴
〈더 크라운〉, 시즌 4 포스터 [출처: SONYCINE]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더 크라운〉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국왕의 삶을 통해 20세기 초반의 유럽 역사를 함께 짚어간다.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끈 작품 방영 중, 〈더 크라운〉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들의 인생이 21세기 사회에도 뉴스에 오르게 되면서, 창작물과 대상이 되는 현실 인물 간 경계가 모호해지고, 한편 그들에 관한 뉴스가 영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증폭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먼저 2019년, 왕세자 찰스의 동생인 앤드루 왕자는 미국의 거대 부호이자,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자인 제프리 엡스타인과 그의 애인이자 동료, 길레인 맥스웰이 운영하는 성매매의 고객이었다는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영국 왕실의 공식적인 모든 직위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듬해인 2020년, 찰스 왕세자의 차남, 해리 왕자가 자신의 부인 메건 마클과 함께 영국 왕실에서 독립해 미국에서 생활하겠다는 발표를 하고 이유에 대한 인터뷰 중, 왕실 내에 인종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한다는 (그다지 놀랍지는 않은) 발언을 하면서, 왕실에 대한 비난이 (특히 미국 언론에서) 공공연하게 수면으로 부상한다. 2021년에는 74년 동안 엘리자베스 2세 국왕과 결혼 생활을 유지해온 그의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왕실은 3년에 걸쳐 그다지 반갑지는 않을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된다.
그들에게 불편할 수는 있어도 일반인들이 가진 왕과 왕비, 왕실에 대한 관심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21세기에 와서는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 국가에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하는 추세이지만, 이들은 봉건주의 시대부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군주들에게서 혼사와 혈통을 통하여 이양받아온 부와 사회적 지위를 몇 세기에 걸쳐 향유하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데 성공한 결과물이다. 이들의 결정과 삶이 더 이상 일반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더라도, 왕과 여왕, 왕자와 공주의 개인적 삶은 대중에게 있어서는 개개인의 삶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영화를 포함한 창작물에서는, 한 국가를 대표한다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이들의 삶이 시대상, 그들이 살아간 시대의 예술품 (중 당대에 가장 물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는 종류), 문화양식, 거시 정치의 흐름을 조망하기 위한 서사적 도구, 혹은 주요 등장인물들로 사용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더 크라운〉을 위시한 왕실을 주역으로 한 창작물에는 공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관음적인 욕구와 이들의 개인적 삶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따라가며 거시사 흐름을 사유하는 역사성(historicity)에 대한 호기심이 혼재되어 있다. 하나의 인물을 반대의 방향에서 비추고 있다. 때문에, 이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창작물들은 인간적 왕과 상징적 왕, 양극으로 팽창하는 인물상을 보인다.
왕, 혹은 지도자의 개인적-공적 인생의 충돌은 기실 극의 역사만큼이나 해묵은 주제이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헨리아드 시리즈, 즉 『리처드 2세』를 시작으로 하여 『헨리 5세』로 마무리되는 4부작 역사극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헨리 4세, 1부』에서 만취해 멧돼지 머리 주점을 걸어 나오며 "나는 너희를 알고 있다"라며 기회가 주어지는 순간 비렁뱅이 같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겠다 다짐하는 할 왕자의 독백이나, 아쟁쿠르 전투 전야에 진영을 거닐면서 왕관의 무게에 고뇌하는 헨리 5세, 즉 왕이 된 할의 "왕에게만 허락되고, 국민은 누리지 못하는 사치가, 격식 말고는, 고작 격식 말고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라며 격식의 허무한 가치에 대해 탄식하는 독백은 이 난제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응답이다.
〈더 크라운〉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이유는, 셰익스피어도 고민했던 이 두 자아의 위태로운 공생을, 현대에 와서도 풀리지 않는 인생의 난제로 각색해 왕이 아니라 대중에게도 공감이 가능한 형태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디 애틀랜틱의 기자 셜리 리는 시즌 4에 대한 평에서 "〈더 크라운〉은 비판으로 국왕을 폄훼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와 같은 인간이 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운 원동력이, 인간적인 면에서 맹점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라고 논했다.
엘리자베스 2세(올리비아 콜먼), 필립 마운트배튼(토비어스 멘지스), 〈더 크라운〉 [출처: Sony Picture Entertainment]
물론, 인물에 대한 심층 묘사가 존재한다 해서, 〈더 크라운〉의 인기에 국왕과 다이애나 스펜서의 개인적 삶에 대한 관음적 흥미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결론내기는 어렵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평전 『다이애나 연대기』를 쓴 티나 브라운은 책 내에서 "만약 여성이 단순히 유명할 뿐만 아니라, 얌전하고, 신중하고, '순수하며', 보호받는 사생활로 유명하다면, 그리고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는데도 도촬 당한다면, 관음적 쾌감에 (몹시 적절한 단어라 생각되는) 침해라는 쾌락이 더해진다"라고 논하면서, 그녀를 따라다니던 파파라치, 그리고 그들의 렌즈가 대변하던 대중의 폭력적 관심을 신랄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이는 왕실의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욱 불공평하게 집중되는 현상이라는 사실은 반박하기 어려울 듯하다. 여왕, 왕비, 공주들은 왕실의 남성 구성원들에 비교해 더욱 가혹한 대중적 잣대에 노출되어 있다. 현대의 왕정은 정치적 "지도자"와는 거리가 있지만, 작가인 터리스 휴스턴은 2016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기고한 칼럼에서 예일 대학교의 빅토리아 브리스콜의 연구를 인용하며, 여성지도자들의 실수가 남성의 실수보다 훨씬 더 가혹한 비판을 받게 된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오해가 없도록 문맥을 설명하자면, 이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휴스턴과 브리스콜은 남성 지도자가 여성이 지배적인 환경, 예시로 여자 대학교에서 실수를 할 경우, 같은 위치에 있는 여성지도자보다 훨씬 큰 비판을 받았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다만, 여자 대학교를 제외하고는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집단은 찾아보기 어려웠기에, 사회 평균적으로는 같은 실수를 하더라도 여성 지도자에 대한 비판이 훨씬 거세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때문에, 〈더 크라운〉을 포함하여, 여왕을 주인공으로 담는 영화 작품에서는, 남성들의 세계에서 가혹한 기준을 감수해가며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의 여성상, 그리고 안에서 갈등하는 개인적 인간으로의 여성상이 그려진다. 한편 인물 묘사 외부에서는 또 다른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카메라는 시대와 국가를 대표하는 얼굴을 담기 위한 역사성에 대한 의무감과, 여왕의 외면적 아름다움과 그녀에게 유혹당하는 주변 남성들의 관음적 시선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러한 연유에서 일까, 유명한 영상 작품에서의 여왕, 혹은 왕비는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가 맡게 되며, 이들의 연기를 통해 다면적인 인물상이 인물 내외에서 불안하게 팽창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예컨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하던 1920년대와 3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그레타 가르보가 17세기 스웨덴의 국왕을 연기한 〈퀸 크리스티나〉(1933)에서는 롤랑 바르트가 "그녀의 별명, '신성한 가르보(The Divine Garbo)'는 아마 그녀의 외모적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라기보다는, 그녀라는 물질적 인간의 정수를 가리키고 있지 않을까"라고 주장한 가르보의 표정이 기록되어 있다.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유럽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살아간 로미 슈나이더가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연기한 〈시씨〉 3부작(1955, 1956, 1957)에는 16살의 소녀가 자신의 표정만으로 비극적 인생을 살아간 황후를 오스트리아-독일-헝가리 3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의 위치에 올려놓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신성한 가르보
그레타 가르보, (左) 아널드 겐테 촬영 초상화(1925), (中) 〈안나 카레니나〉(1935), (右) 〈니노치카〉(1939) [출처: Wikimedia Commons]
1941년. 무성영화 시대부터 유성영화 시대까지, 약 20년 동안 전 세계 영화팬들을 사로잡았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은퇴를 발표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36세. 20세기 후반, 21세기 영화계에서 30대 중반이란 대부분의 배우가 연기에 각성하거나, 독자적인 연기론을 시작하거나, 혹은 오랜 시간 동안 무명으로 지내면서 다져온 연기 실력이 대중에게 막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다.
가르보는 10대 후반에 데뷔하여, 수많은 무성영화 스타들을 좌절하게 만든 유성영화로의 전환에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가르보 마니아'라는 팬덤이 형성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가르보는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배우에 그치지 않았다. 상패가 연기력의 절대적 척도가 될 수는 없지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4번이나 후보에 올랐고,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에서 2년 연속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여배우가, 놀랍게도 36세의 나이에 연기 은퇴를 선언했다.
이미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가르보는 그녀의 비교적 짧은 연기 경력,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에 비해 (혹은 정확히 그러한 연유로 인하여) 기이할 정도로 문화사에 깊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녀의 활동 당시, 그녀가 처음으로 유성영화에서 연기를 했던 〈안나 크리스티〉(1930)의 여러 포스터 중에는 영화의 제목보다 큰 글씨로 "가르보가 말을 한다! (Garbo talks!)"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경우도 있었다. 상기했듯이, 롤랑 바르트라는 걸출한 철학자가 그녀의 얼굴(혹은 얼굴이 가진 의미)에 대한 에세이 「가르보의 얼굴」을 집필했으며, 1940년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가르보를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문예지인 더 뉴요커의 3대 편집장을 지낸 로버트 고틀립은 그레타 가르보가 상업 영화에 데뷔한 지 정확히 99년이 지나서 『가르보』(2021)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평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레타 가르보, 〈안나 크리스티〉(1930) [출처: Fanpop]
더 뉴요커의 작가 마거릿 탈봇은 자신이 일하는 직장의 전설적인 옛 수장의 책을 평론하면서 가르보의 인생을 따라간다. 은막의 왕족에 가까운 가르보의 이미지를 보면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녀는 1905년 스웨덴에서 몹시 가난하지만 화목했던 가정에 그레타 로비사 구스타프손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모친은 몹시 실리적인 여성이었다고 묘사되며, 부친은 가난했으나 몹시 뛰어난 외모와 음악적 감각을 가지고 있어 막내딸인 그레타가 곧잘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이 신장병으로 쓰러지자, 그레타 구스타프손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모시고 스웨덴의 자선병원을 돌아다니며 진료를 구걸해야 했고, 이때의 경험은 그녀가 평생 자신의 어린 시절이 우울했다고 기억한 계기가 된다. 어쩌면,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항상 타인에게 적선을 받거나, 남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했어서인지, 가르보는 유명해진 후 "어릴 때부터 … 항상 혼자 있을 수 있기를 바랐다"라고 고백한다.
그녀가 14살 때,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일하던 백화점의 광고 촬영으로 당시 스웨덴에서 고속 성장하고 있던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 당시 그녀의 연기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그레타 구스타프손은 17세에 스톡홀름의 왕립 드라마 극단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3년, 스웨덴의 젊은 영화감독 마우리츠 스틸레르가 최초의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자 자국의 국민작가로 존경을 받고 있는 셀마 라게를뢰프의 환상문학 장편소설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의 주연을 발탁하기 위해 극단을 방문하게 되고, 전혀 연기 경험이 없는 구스타프손을 캐스팅한다.
그레타 가르보(1924) [출처: Wikimedia Commons]
당시 40세의 나이였던 스틸레르는 18세 소녀였던 그레타 구스타프손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스틸레르 본인은 동성애자였기에 둘 사이에는 육체적 애정은 없었지만, 스틸레르는 구스타프손과 진실된 우정을 나누었다. 아마 그녀가 이름을 그레타 가르보로 개명한 계기 또한 스틸레르의 제안에 기반하지 않았을까 추측되며, 당시 유럽 영화계에서 뛰어난 감독과 배우를 찾던 영화사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에서 스틸레르를 스카우트하자, 그는 신인 여배우인 가르보가 스카우트 계약에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후, 작품 준비 기간이 필요한 감독인 스틸레르와는 달리 가르보는 MGM에서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촬영 준비가 완료된 2개의 작품 〈급류(The Torrent)〉(1926), 〈신비로운 여인 (The Temptress)〉(1926)에 연속으로 출연했고, 두 작품 모두 흥행에 성공하면서 순식간에 스타의 위치에 오른다. 다만 스틸레르는 어떤 이유에서든 미국에서 작품을 만드는데 실패해 혼자서 스웨덴으로 귀국하고, 가르보가 당시 무성영화 최고의 여배우였던 릴리안 기쉬와 비견될 정도로 유명해진 1928년 돌연 세상을 떠난다.
은사의 죽음은 그녀를 극심한 우울감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스틸레르의 장례식을 치르고 할리우드로 돌아온 가르보의 앞에는 슬픔을 떨치기도 전에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유성영화 데뷔였다. 가르보는 1930년, 〈안나 크리스티〉를 통해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북유럽 억양으로 연기해야 한다는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고,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수많은 배우들과는 달리 성공적으로 유성영화에 안착해 명실공히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거듭난다.
그러나 그녀는 유명해질수록 점점 더 유명세에 염증을 느꼈고,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에 걸쳐 수 회 자신과 함께 연기한 배우인 존 길버트와 연애를 하기도 했지만 그의 구혼을 거절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가르보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팬들을 피해, 늦은 저녁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남장에 가까운 복장으로 산책을 즐겼는데, 당시 그녀의 옷장에는 남성복들이 즐비했다고 전해진다. 길버트와의 연애 외에도 그녀는 동성 연인을 가졌다고 추측되는데 작가인 메르세데스 데 아코스타가 후보로 꼽힌다.
유성영화 시대에도 뛰어난 연기력과 독보적인 외모로 두터운 팬층을 자랑했던 가르보지만, 〈두 얼굴의 여인〉(1941)을 마지막으로 30대 중반의 나이에 영화계에서 은퇴한다. 놀랍게도, 가르보는 은퇴 이후에 할리우드의 화려한 유혹과 완전하게 결별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은퇴 후 텔레비전이나 잡지 등 인터뷰를 철저하게 거부했고, 대중과 언론의 관심으로부터 숨어, 1990년 84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타계하기까지 미혼으로 은둔 생활을 향유했다.
크리스티나(그레타 가르보), 〈퀸 크리스티나〉(1933) [출처: FILMGRAB]
가르보의 대표작, 〈퀸 크리스티나〉를 상징하는 유명한 두 장면이 있다. 방을 거닐며 가구를 안고 순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다던 행복한 미소의 국왕,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배 위에서 석고상과도 같은 정적을 머금은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는 국왕. 이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역시 가르보는 가르보다', '왜 가르보, 가르보 하는지 알겠다'라는 시답잖은 평으로 수렴해버리는 기이한 감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든다. 우리가 가르보를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필름 위에 기록된 배우의 얼굴이란, 연기력, 외모를 포함해 재생되는 이미지 정보 총합을 초월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육체성(physicality)이라는 애매한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는 매력을 반증했기 때문이 아닐까.
퀸 크리스티나-가르보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 〈퀸 크리스티나〉 [출처: FILMGRAB]
영화는 여느 역사영화처럼, 화면상의 자막을 통해 1632년, 30년 전쟁의 중반에 스웨덴 국왕이자 천재 전략가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뤼첸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국운에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을 설명한다. 구스타브 2세의 사망 씬으로 이어진 후, 스웨덴 왕궁으로 돌아간 카메라는 태어날 때부터 부왕으로부터 남자 후계자와 다름없이 군사 및 제왕 교육을 받아온 6세의 크리스티나 공주가 당당하게 왕위를 계승할 의지를 천명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왕위에 오른 크리스티나 국왕은 존경받는 국왕이었던 구스타브 2세의 의지를 계승한 충신들의 도움을 통해 위태로운 30년 전쟁 중에도 스웨덴을 슬기롭게 이끌어간다.
성인으로 성장한 크리스티나 국왕(그레타 가르보)이 승마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자, 그녀를 어린 시절부터 보좌해 온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루이스 스톤)를 비롯한 대신들은 후사와 스웨덴의 미래를 위해 결혼을 고려해달라는 간언을 올린다. 국민에게 존경받는 왕에게 어울리는 결혼 상대는 그녀의 사촌이자 전쟁 영웅인 칼 구스타브(레지날드 오웬)로, 조건에는 문제가 없지만 크리스티나는 기획화된 결혼에 대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그녀는 암암리에 젊고 패기 넘치는 귀족 마그누스 백작(이안 키스)을 연인으로 두고 있지만, 구혼을 해오는 그에게도 진지한 관계에 대한 확답을 주지 않는다.
중신들의 강요에 가까운 간언이 지긋지긋해진 왕은 남장을 하고 호위인 아게(C. 오브리 스미스)만을 대동한 채 스웨덴의 시골로 승마를 나갔다가, 쌓인 눈에 바퀴가 빠져 옴짝달싹 못하는 마차를 만난다. 마차의 구성원들이 외국 출신의 귀족임을 확인한 왕은 이미 보고를 받았던 스페인 국왕의 사절단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마차를 수렁에서 꺼내는데 도움을 주고 떠난다.
크리스티나(그레타 가르보), 〈퀸 크리스티나〉 [출처: FILMGRAB]
그날 저녁, 눈바람이 거세지자 크리스티나는 환궁 대신 시골의 작은 여인숙에서 숙박을 하기로 결정한다. 굳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왕은 젊은 남성 귀족 행세를 하며 여관에 유일하게 남은 최고급 방을 예약하고 홀의 구석에서 떠들썩한 국민들을 관찰하면서 식사를 한다. 잠시 후 일찍이 도움을 받았던 스페인 사절단이 입장하고, 사절단을 대표하는 돈 안토니오(존 길버트)는 반갑게 크리스티나와 합석한다. 그녀를 젊은 남성 귀족으로 알고 있는 안토니오는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둘은 곧 의기투합하면서 우정을 나눈다. 밤이 늦어지자, 안토니오는 만약 불편하지 않다면 방을 함께 사용해도 될지 물어보고, 변장한 크리스티나는 주저하다가 동의한다.
방에 들어가서 결국 크리스티나는 국왕이라는 신분은 숨기지만, 여성임을 밝히고 기뻐하는 안토니오와 함께 운우지정을 나눈다. 눈폭풍이 거세지는 바람에 둘은 며칠간 방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관계를 지속하고, 크리스티나는 처음의 기대보다 안토니오에 대한 연정이 깊어짐을 느낀다. 눈 때문에 허름한 여관에 갇혀, 심지어 정체를 속이고 있음에도,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느낀 크리스티나는 문득,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여관방의 가구를 껴안거나, 애정 어린 손길로 벽을 어루만진다. 그런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던 안토니오가 그녀에게 행동의 연유를 묻자, 크리스티나는 이 방을 암기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둘의 짧은 연애는 눈이 녹으며 끝이 나고, 크리스티나는 끝까지 정체를 숨긴 채 안토니오와 이별한다.
크리스티나(그레타 가르보), 안토니오(존 길버트), 〈퀸 크리스티나〉 [출처: FILMGRAB]
스톡홀름의 궁으로 돌아온 크리스티나는 화려한 복장을 입고 스웨덴 왕국의 국왕의 입장으로 사절단 대표 안토니오 피멘텔 드 프라도를 맞이한다. 그녀를 접견한 안토니오는 몹시 놀란다. 안토니오가 먼 북유럽까지 온 이유에는 자신의 군주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크리스티나에게 보내는 두 국왕 사이의 혼인 의사를 담은 외교문서의 전달과 혼담을 진행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는 크리스티나가 스페인의 국왕을 모욕하고, 사절단 대표를 희롱하기 위해 일부러 정체를 숨겼다고 생각해 그녀에게 실망감을 표한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둘 사이의 시간은 순수했으며, 안토니오에 대한 애정 또한 여전하다고 고백한다.
크리스티나는 스웨덴 왕궁의 중신들의 걱정과 옛 연인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를 가까이 두고, 이에 위협을 느낀 마그누스 백작은 스웨덴의 국민들에게 국왕이 외국에서 방문한 귀족에게 마음을 빼앗겨 스웨덴의 주권이 스페인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소문을 낸다. 이에 왕궁으로 몰려들어 스페인 사절을 추방시키라는 요구를 하는 국민들 앞에서 크리스티나는 자신은 평생 스웨덴을 위하여 살아왔다고 웅변하면서 그들을 진정시킨다.
크리스티나(그레타 가르보), 〈퀸 크리스티나〉 [출처: FILMGRAB]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의 무게에 대한 질식감, 그리고 안토니오와의 연애에서 느낀 자유에 대한 갈증으로 인해 크리스티나는 신하들과 국민들의 진심 어린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의 사촌인 칼 구스타브에게 양위를 양도하기로 결정한다. 자유인이 된 크리스티나는 안토니오에게 편지를 보낸다. 둘은 따로 이동해 항구에서 만나 안토니오의 고향으로 함께 떠나기로 약속하지만, 안토니오는 자신을 모욕한 마그누스 백작과의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만다. 크리스티나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위중한 상태였고, 그녀와 작별을 한 후 숨이 끊어진다. 자신의 자유를 상징했던 안토니오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그녀는 그의 고향을 향해 떠가기로 결심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퀸 크리스티나〉를 전기영화라고 부르기에는 실제 크리스티나 국왕의 삶과 그레타 가르보가 연기한 크리스티나의 행적 사이에는 꽤나 넓은 간극이 존재한다. 가령, 안토니오 피멘텔 드 프라도가 스페인 출신의 스웨덴 대사였으며, 외국인의 신분으로도 크리스티나 왕의 심복이 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만, 역사상 안토니오는 크리스티나가 왕위를 이양한 후에도 살아남아 그녀와 지속적인 교류를 맺었다. 다만 둘의 사이를 연인으로 보기에는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동시대의 기록 및 크리스티나 본인이 남긴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 의해 남성 후계자와 다름없이 양육되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남성 의복을 입고, 남성과 같은 행동양식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후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에 기반해, 그녀의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펼치기도 한다. 그녀는 또한 통치 중에도 부지런한 지도자로 유명했으며, 어떠한 유럽의 군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도록 자기 계발에도 열심이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철학자였던 데카르트를 초빙해 매일 새벽마다 그를 깨워가며 철학 과외를 받았는데, 몸이 허약했던 데카르트는 스웨덴의 척박한 기후와 군대에 가까운 스케줄에 결국 폐렴이 걸려 1년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스웨덴을 훌륭하게 통치했지만, 30년 전쟁의 근원적 이유 중 하나인 종교에 관련해서도 몹시 자유로운 견해를 보였다. 국교인 루터교가 아니라 가톨릭에 심취해 있었으며, 왕위를 양도한 후 브뤼셀에서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개종식에 안토니오가 참가했다), 인스브루크에서 공개적으로 개종을 선언하고는 로마에 정착하기도 했다.
남장을 한 크리스티나(그레타 가르보), 〈퀸 크리스티나〉 [출처: FILMGRAB]
종합하자면, 크리스티나는 유년시절부터 남성처럼 성장해 중성, 양성적인 성향을 공공연히 내비치며, 아기나 다름없을 때 왕위에 올랐음에도 30년 전쟁이라는 위태로운 시대에 국가를 훌륭하게 통치하고, 철학의 발전과 문학 및 예술에도 관심과 투자를 쏟은 후, 서른이 되기 전 미련 없이 왕위를 양도,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가톨릭으로 개종, 평생을 미혼으로 살아갔다. 현대에 이런 인물에 대한 소설을 써도 과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설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대에 이런 삶을 살아간 인물을 알고 있다. 다름 아닌 크리스티나를 연기한 가르보 본인이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본인이 스웨덴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가르보는 이 영화의 스토리를 받기 전까지 역사적 크리스티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영화 상의 크리스티나는 왕위를 이양하기 직전인 28세였는데, 영화의 촬영 시 가르보 또한 동일한 나이였다.
〈퀸 크리스티나〉의 제작자는 월터 웨인저로 그는 본 작품 후에도 잉그리드 버그만과 〈잔 다르크〉(1948),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클레오파트라〉(1963)를 만들면서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를 기용해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여성 인물들의 삶을 블록버스터 영화로 제작하는 기획을 2번이나 반복하게 된다. 웨인저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루벤 마물리안 감독을 기용하고, 18개월 정도 휴식을 하고 있던 가르보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본 영화 제작 돌입에 들어가게 된다. 가르보는 상대역인 안토니오로 자신의 옛 연인인 존 길버트를 강력하게 추천했지만, 그는 본 작품 이후 MGM의 대표인 루이 버트 메이어와 마찰을 빚고, 영화계에서 퇴출에 가까운 은퇴를 한 후, 3년 후 사망한다.
만약 영화 외적의 기묘한 우연들과 영화 전후 가르보의 삶을 인지하고 '방의 암기' 씬으로 돌아가 본다면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해석이 모양을 갖춤을 느끼게 된다.
바닥에 자유롭게 누워 안토니오가 건네주는 포도를 음미하던 크리스티나는 문득 일어나서 지난 며칠간 묵어왔던 방을 긴장이 서린 표정으로, 마치 잊었던 무언가를 찾는 듯이 둘러본다. 방 전체를 담는 와이드로 전환한 숏은 그녀가 일어나서 천천히 방을 배회하는 모습을 담는다. 크리스티나의 걷는 속도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무언가를 찾고 있던 지간에 딱히 급한 상황은 아닌 듯하다. 카메라는 패닝 해 벽의 작은 장롱으로 다가가는 크리스티나를 보여주고, 크리스티나는 천천히 찬장을, 그리고 찬장 위에 놓여있는 촛불을 쓰다듬는다. 찬장의 옆으로 돌아간 그녀를 담기 위해 카메라는 위치를 옮겨 거울을 들여다보는 숏으로 전환된다. 관객은 크리스티나의 얼굴, 그리고 거울에 비친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보고 있지만, 다음 인서트에서 관객은 크리스티나가 거울에 비친 안토니오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크리스티나(그레타 가르보), 안토니오(존 길버트), 〈퀸 크리스티나〉 [출처: FILMGRAB]
거울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은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벽을 어루만지고, 방 한쪽에 놓여있는 물레를 돌리다가, 가끔 안토니오를 바라본다. 그리고 침대로 돌아가 누워서 안토니오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는 크리스티나의 행동에 대한 의아함, 하지만 방을 거니는 그녀가 발산하는 어떠한 신성한 기운에 경도되어 질문으로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신앙적 트랜스가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침대의 기둥을 안고 만족한 표정을 짓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질문한다. "무엇을 하고 있나요?" 크리스티나는 대답한다.
이 방을 암기하고(memorizing) 있어요. 저는 미래에, 제 기억에 남아있는 이 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거예요.
무척 아름답고 낭만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감상이다. 그녀는 감사(appreciate), 혹은 즐김(enjoy)이 아니라 암기(memoriz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단순히 순간에 잠식되어 새로운 눈으로 향유함이 아니라, 미래에 돌아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방을 기억 속에 새겨 넣기 위해 암기를 하고 있다. 또한 그녀가 암기하는 대상과, 방을 배회하면서 어루만졌던 사물을 상기해보자.
크리스티나(그레타 가르보), 〈퀸 크리스티나〉 [출처: FILMGRAB]
크리스티나는 "이 방"에 존재하는 안토니오가 아니라, 안토니오가 포함된 "이 방" 전체를 기억에 담는다. 연정의 대상인 남자 또한 방의 가구 중 일부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안토니오가 죽었음에도 자유를 향해 스웨덴을 떠나는 크리스티나의 결정을 통해 그녀가 갈구하던 목표가 하나의 남자, 하나의 사랑이 아니라, 이 방에서 느꼈던 완전한 자유였다는 감상이 자리잡는다.
고틀립의 평전에서는 가르보가 은사였던 스틸레르의 사후, 그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1928년에 스웨덴으로 귀국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가르보는 스틸레르의 유품이 보관된 창고를 거닐면서,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어루만지며 은사와의 추억을 혼잣말로 되뇌었다고 한다. 자신의 은사이자, 자신을 뮤즈로 삼았던 남성의 사후, 영화에서 자신의 옛 연인이자, 자신을 숭배했던 (그리고 당시 둘 모두 모르고 있었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던) 남성과 함께 한 씬에서, 그들과의 기억을 수집하고 있다. 만약 이 영화를 촬영하며, 가르보가 본인이 곧 자의로 영화계를 떠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대중의 관심에서 멀리 떠나, 크리스티나-그레타 가르보는 이들과의 기억을 가구 삼아 자신의 여생을 보낼 꿈의 궁전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크리스티나 왕의 생애, 가르보 본인의 인생, 영화의 연출의 결합은 현대에 와서 〈퀸 크리스티나〉에 숨어있는 퀴어적 감성을 읽는데 중요한 단서로 사용된다. 더 뉴요커의 탈봇 또한 수많은 젠더 연구자들이 이 작품을 퀴어 영화로 분류하는데 주저함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조차, 바르트가 「가르보의 얼굴」에서 이야기했던 가르보의 얼굴이 간직한 상징성에 의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르보의 얼굴은 시네마의 위태로운 전환을 상징한다. 근원적 아름다움에서 존재적 아름다움이 추출되는 순간, 전형(archetype)적 인물이 유한한 인간으로 굴절되는 순간, 육체적 정수의 명료함이 물러서고 여성성이 서정적으로 표출되는 순간.
묘하게도, 바르트가 묘사하고 있는 전환기는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의 전환과 맞물려 있다. 단순히 은막 위의 얼굴로 존재하며, 대중이 상상하는 목소리를 투입할 수 있었던, 연극보다는 소설에 가까웠던 "전형적 인물"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유한하고, 부패가 가능한 육체적 인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20세기에 와서 지도적 기능을 상실한 왕실이, 매스미디어로 송출되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그들도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대중의 인식 전환과도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만약 사라진 왕가를 대신해 현대인들이 연예인들을 새로운 왕실로 추대했다면, 그들을 향한 대중의 관음적 관심은 지극히 당연한 현실이다. "가르보가 말을 한다"라는 선언만으로 극장에 관객을 모을 수 있었던 가르보는 자신의 목소리를 궁금해하는 대중들을 보며, 배우들이 맞서야 할 가혹한 현실을 이미 깨닫고 있지 않았을까.
크리스티나 왕은 성난 대중 앞에서 위대한 웅변을 해 그들을 매혹시켰지만, 순간을 기점으로 왕위를 내려놓을 결심을 했다. 아마, 가르보 본인은 바르트가 말했듯이 본인의 이미지가 은막 위의 아름다운 인간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며 무력하게 노출되는 유한성이 두렵다는 형이상학적 이유로 대중문화의 왕위를 이양하지는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가르보가 상징하던 전형적 배우 뒤에는 인간 가르보가 존재했고, 인간 가르보는 대중의 관심을 즐길만한 성격이 아니었을 뿐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녀는 불과 15년 정도에 가까운 시간만을 대중에게 노출했고, 크게 바뀌지 않은 외모로 역사의 기억에 남았다. 15년 동안, 불변하는 하나의 얼굴로, 영화사에는 하나의 순간, 하나의 기억, 하나의 이상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녀가 지은 꿈의 궁전을 거닐 수 있다.
전후 독일과 고향의 영화(Heimatfilm)
(左) 〈시씨 - 1부〉(1955), (中) 〈시씨 - 2부〉(1956), (右) 〈시씨 - 3부〉(1957) [출처: 네이버 영화]
독일의 공영방송인 DW는 2020년 크리스마스이브, 그 해에도 돌아온 전통인 《시씨 3부작》 방영을 앞두고 온라인 지면을 통해 해외의 독자들에게 왜 독일에서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65년 전에 만들어진 19세기 오스트리아의 황녀를 주인공으로 담은 역사극을 방영하는지 소개를 하였다. DW의 기자 스테판 데게는 이 사극의 가볍고 따뜻한 역사 해석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리된 독일 국민들을 치유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하면, 비평적으로 특별한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작품이 공개됐던 순간의 시대적 배경과 관객의 마음가짐이 공명했기에 작품이 영화 이상으로 기억되고 있지 않을까라는 추측이다.
관객이 작품과 맺는 연결 고리에는 작품의 비평적, 대중적 흥행과 달리하는 세 번째 축이 있다. 어떠한 순간에 작품을 보았는지, 그리고 순간에 관객이 개인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있었는지에 따라 영화에 개인적 유대감이 형성되며, 이는 작품적 완성도와도 관계없이, 하나의 숏, 씬, 대사만 경험함으로도 가능해진다. 3부작의 첫 작품인 〈시씨 - 1부〉(1955)가 공개된 50년대 중반은 독일이 막 제2차 세계 대전의 후폭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시대였기에, 패전을 경험한 국민들에게 공통적으로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과 상흔이 남아있었다. 아직 법적 성인이 되지도 않았던 아역배우인 주인공 시씨(로미 슈나이더)가 발산하는 에너지는 스크린 위에서 독일 국민 전체가 개별적으로 느끼고 있던 상실감을 채워주는, 전쟁 이후의 삶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근원적 활력으로 전환되어, 이 작품이 독일 현대 문화의 일부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어권의 시네마가 〈시씨〉로 연결되기까지는 약 10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종전의 직후에는 전쟁이 남긴 풍경을 그대로 담아내는 잔해 영화(Trümmerfilm) 장르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영국의 영화 평론가 매튜 스리프트는 BFI에 기고한 기사를 통해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전쟁 3부작》 마지막 작품, 〈독일 원년〉(1948)과 빌리 와일더 감독의 〈외교 문제〉(1948), 하워드 혹스 감독의 〈나는 전쟁 신부〉(1949) 등을 소개하면서, 이 시대의 작품들은 물리적, 혹은 심리적 배경을 제외하고는 서사적이나 형태적으로 같은 장르로 묶이기는 애매하다는 평을 내렸다. 40년대의 독일인들에게 전쟁 자체, 그리고 제3제국이 남기고 간 흔적은 아직 너무나 생생한 기억으로, 역사라기보다는 어제에 가까웠다. 어쩌면 이 시대의 영화들은 불과 몇 년 전 일어나고 있던 거대한 사건을 마주 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릴 만큼의 심리적 거리를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독일 원년〉(1948) [출처: Criterion]
때문에, 전후의 풍경을 단순히 관조적으로 배경 삼았던 잔해 영화 장르와 함께, 사회 전반적으로 돌무더기의 원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는 과거의 극복(Vergangenheitsbewältigung)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어 전후의 독일 문화와 사회 전반에 다방면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단어는 "페어강겐하이츠베벨티궁"이라는 발음만큼이나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거칠게 요약하자면, 나치 정부에게 협조했던 국민들의 후회,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전쟁 범죄에 대한 사죄와 자성, 그리고 그를 딛고 나아가기 위한 탈나치 작업 모두를 포괄한다.
독일 영화계에서는 잔해 영화 이후, 고향 영화(Heimatfilm)라는 장르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잔해 영화가 그려내던 돌무더기가 된 도시를 떠나, 전쟁의 피해를 비교적 적게 입은 산골과 시골을 무대로 한 이 영화 작품들은 알프스 산맥과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 삼아 통속극에 가까운 간결한 서사구조를 내세워 전쟁과 관계없는, 혹은 전쟁 이후 독일이 목표 삼아야 할 목가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오스트리아에서 제작된 〈시씨 - 1부〉(1955), 〈시씨 - 2부〉(1956), 〈시씨 - 3부〉(1957) 3부작은 엄밀히 말하면 독일의 영화는 아니지만,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먼저 나치당을 받아들이고, 독일과 합병(안슐루스)이 되었기 때문에 같은 패전국 취급 및 연합군에 의한 군정 통치를 받았고, 전후에도 독일과 유사한 문화 및 사회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영화가 개봉한 1955년은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영원히 통일하지 않고, 영구 중립국 선언을 조건으로 독립한 해로, 감독 언스트 마리슈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비운의 황녀, "시씨"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을 독일과 분리된, 고향인 오스트리아만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라는 국가적 정체성의 확립과는 별개로 본 작품은 고향 영화의 특징인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대한 찬미를 담고 있고, 2003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전후 독일 영화 상영전인 《전쟁 이후 / 벽 이전》을 소개할 때는 "아마 고향 영화의 정수라고 부를 수 있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폰 비텔스바흐의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하지만 60년과 70년대에 와서 독일 영화계에는 젊은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고향 영화 특유의 목가적 풍경과 자연주의 예찬에 대한 반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자연주의에 경도되는 현상은 전쟁을 일으킨 인간 내부의 근원적 악의에 대해 고개를 돌리는 의무 방기, 혹은 현실 도피라는 지적이었다. 독일의 영화 역사학자인 사빈 하케는 『독일 민족 영화』에서 "관객들은 통속적인 유흥만을 즐겼고, 예술과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가장 중요하게도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문제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케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된 현실 도피적 경향은 "1962년, 젊은 독일 영화인들이 오버하우젠 선언을 통해 독일 영화의 '영시(Stunde Null)'을 선포하고, 실험과 혁신, 도발의 시대를 여는 계기를 마련했다"라고 논한다.
하케의 정리는 영화사 조류의 정리를 개괄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충분하지만, 관객이 고향 영화를 통속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도구로만 받아들였다는 환원적 해석은 《시씨 3부작》이 2020년에 와서도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방영되고 있다는 전통의 연유를 체감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구석이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중동의 종교 지도자 탄생에 대해 특별한 가치를 매겨 미국의 명절 영화인 〈나 홀로 집에〉(1990), 혹은 영국의 명절 영화 〈러브 액츄얼리〉(2003)를 상영하는 전통이 있지만, 이러한 작품들은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라도 하지, 《시씨 3부작》과 크리스마스의 연결성이란 주인공인 엘리자베트가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났다는, 영화에서는 논의조차 되지 않는 트리비아 정도일 뿐이다.
이에 대해 옥스퍼드의 독어학자 사빈 뮐러는 《시씨 3부작》의 인기는 단순히 전후의 독일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어서만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즉 시씨의 아버지인 맥시밀리안 요제프 공작은 바이에른에서도 시골 동네인 포센호펜에 거주했고, 공작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싫어했으며, 젊은 시절에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여행해 피라미드를 올랐을 정도로 방랑벽이 있었고, 장성해서도 서커스를 즐기는 등, 유아적 취미와 기행으로 유명했다. 맥시밀리안 요제프 공작은 당대에도 바이에른의 민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지터라는 평민들의 현악기를 배워 직접 민요를 작곡하기도 할 정도로 공작이라고 하기에는 별종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그런 부친 아래서 자란 시씨 또한 자유분방한 기질로 유명했다.
뮐러는 《시씨 3부작》에서 그려지는 자연에 대한 그리움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갈구했음에도 현실 정치에 희생당한 비극적 인생을 살아간 시씨를 통해 화사한 화면 뒤, 독일-오스트리아 관객들에게 시각적 고향을 넘어, 상징적 고향, "정상 상태(normality)"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고 논한다. 개봉 후 65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 작품이 매년 크리스마스에 공영 방송을 통해 독일 국민을 찾아가는 이유에는 작품에 어린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기운만큼이나, 수면 아래 던지는 질문의 무게감이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퀸 시씨-슈나이더
시씨(로미 슈나이더), 〈시씨 - 1부〉(1955) [출처: DoBlu.com]
《시씨 3부작》의 내용은 주인공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삶을 느슨하게 따라가고 있다. 실제 역사의 인물 시씨는 1853년, 15세의 나이에 외사촌인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만났고, 이듬해에 결혼을 해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녀는 황실의 엄격한 예법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황후의 책임과 임무를 강요하는 시어머니인 조피 프레데리케 폰 바이에른 대공비와도 육아의 건으로 마찰을 빚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시씨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고 전해지지만,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와 시씨 간의 고부갈등을 능동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시씨는 나이가 들어서는 황후의 책무를 뒤로 하고 국외로 여행을 다니곤 했다. 시씨는 1898년, 비밀리에 스위스의 제네바를 여행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한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을 당하면서 60세의 나이로 굴곡진 인생을 마친다.
〈시씨 - 1부〉는 프란츠-요제프를 만난 시점부터 1854년의 결혼식까지를, 〈시씨 - 2부〉는 황후가 된 그녀가 쇤부른에서 신혼살이를 하는 이야기로 시작되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통일까지를 다루고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일은 1867년에 이루어졌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1부와 2부 사이에는 약 13년 정도의 기간이 존재해야 하지만, 주연 배우들의 외모 및 서사의 긴장을 위해서 결혼식과 첫 황녀의 탄생, 그리고 헝가리와의 통일이 동시간대에 진행되도록 수정되었다. 〈시씨 - 3부〉는 지속되는 고부갈등 및 남편과의 오해로 인하여 건강이 악화된 그녀가 해외로 요양을 간 후, 기적적으로 회복을 해 남편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최근에 정복한 이탈리아의 도시를 순회하며 부부간의 애정을 회복하는 일화를 담고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이탈리아의 영토인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정복한 사건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통일 이전에 일어났으며, 영화에서는 심신 양면으로 상처를 입고 있는 부부의 화해로 서사를 맺기 위해 고증을 의도적으로 무시해 각색하였다.
3부작 모두 대중적으로 큰 흥행 성공을 거두어 언스트 마리슈카 감독은 4부를 기획했지만, 3년 내내 시씨를 연기했던 로미 슈나이더는 역할로 돌아오기를 거절했고, 영화 시씨는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을 다루지 않은 채 3개의 작품으로 끝을 맺는다. 슈나이더는 15년이 지난 후, 이탈리아의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연출한 〈루드비히 신들의 황혼〉(1972)에서 주인공 루트비히 2세 바이에른 국왕의 사촌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즉 시씨 역할로 돌아오게 된다. 슈나이더 또한 30대 초반의 나이로 돌아온 만큼, 그녀는 과거 소녀의 모습보다 원숙하고 현실 정치에 익숙한 시씨를 연기해냈다.
《시씨 3부작》을 지배하는 갈등은 시씨의 고향 바이에른의 포센호펜 성과 그녀의 부모가 상징하는 자연애와, 비엔나의 쉔부른 성과 조피 대공비가 상징하는 규율과 허례허식에 잠식된 도시사회의 발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갈등을 시작하기 위해 〈시씨 - 1부〉의 초반부에서 아버지인 맥시밀리안 요제프 공작(구스타브 크누스)은 시씨와 함께 바이에른의 아름다운 산과 숲을 산책하면서 3부작에서 그려지게 될 그녀의 인생을 정의하게 되는 조언을 건네준다.
너의 삶이 힘들거나 슬플 때는, 숲을 거닐면서 눈을 뜨고 주위를 바라보렴. 모든 나무와 수풀에, 모든 꽃과 동물에게 신의 전능함을 찾을 수 있을 테고, 경험이 네게 위안과 힘을 줄 거야.
시씨(로미 슈나이더), 맥시밀리안 요제프 공작(구스타브 크누스), 〈시씨 - 1부〉 [출처: DoBlu.com]
사빈 뮐러는 맥시밀리안의 충고와 20세기 초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반더포겔(Wandervogel) 운동을 연결 짓는다. 반더포겔은 1901년, 독일 청년들 사이에 큰 호응을 얻었던 사회적 운동으로 "철새"를 뜻하는데, 철새와 같이 산천초목을 다니며 건강한 육체를 기르고, 자연애와 조국애로 건강한 정신을 키우자는 목표 및 행동강령을 내세웠다. 뮐러는 "이 문맥에서, 고향(Heimat)이란 일정한 장소가 아니라 소속감을 의미하고, 한발 더 나아가, (단단한 소속감에서 야기되는) 인간의 진정성을 내비친다"라고 주장한다.
영화로 돌아가 보면, 시씨의 어머니 루도비카 공비(마그다 슈나이더)는 자신의 언니인 조피 대공비(빌마 디지셔)의 초대를 받아, 언니의 아들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젊은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칼하인즈 봄)와 자신의 장녀 헬렌(우타 프란즈)을 약혼시키기 위해 바트이슐의 황실 별장으로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시씨는 여행의 목적은 모른 채 모친과 언니의 여행에 함께 따르게 되고, 바트이슐에 도착해 낚시를 하기 위해 몰래 숙소에서 나왔다가, 바트이슐로 향하고 있던 프란츠 요제프를 만나게 된다. 젊은 청년이 자신의 사촌오빠이자, 황제라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어린 시씨는 장난기가 발동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와 함께 동네 근처의 산과 숲을 거닐며 가까워진다. 프란츠 요제프가 시씨에게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시씨가 그를 대함에 있어 주위의 모든 신하와 사람들과는 다른 자연스러운 태도와, 산책에서 보여주는 자연지향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속소로 돌아온 시씨에게 모친과 언니 헬렌은 여행의 목적, 즉 헬렌과 프란츠 요제프의 약혼 계획을 밝히고, 시씨는 자신이 언니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상황에 실의에 빠진다.
프란츠 요제프(칼하인즈 봄), 시씨(로미 슈나이더), 〈시씨 - 1부〉 [출처: DoBlu.com]
프란츠 요제프는 바트이슐 궁전에서 이모 루도비카 공비, 사촌이자 자신과 결혼을 할 계획인 헬렌, 그리고 시골 소녀라고 알고 있던 시씨와 정식으로 인사하게 된다. 조피 대공비와 루도비카 공비는 프란츠 요제프와 헬렌을 이어주려 하지만, 젊은 황제는 처음으로 모친 조피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은 시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선언한다. 프란츠 요제프가 헬렌이란 여성을 싫어한다기보다는, 헬렌과의 만남과 혼약은 프란츠 요제프를 숨 막히게 하는 제도, 신분, 격식, 규율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와 시씨와의 만남은 우연처럼 자연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녀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그녀가 상징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황제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상처받은 헬렌은 고향을 떠나 여행길에 오르고, 홀로 포센호펜에서 결혼식을 준비하는 시씨는 언니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비엔나로 떠나기 전 헬렌이 돌아와 시씨와 극적으로 화해를 하면서 시씨와 가족은 다 함께 유람선을 타고 다뉴브강의 조류를 따라 비엔나로 떠난다. 강을 따르는 여행길에서 시씨는 오스트리아의 각지의 평민들이 새로운 황후를 환영하는 인파를 바라보며 행복한 웃음을 짓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10대 소녀가 감당하기 힘든 국민의 애정과 관심에 대한 부담감이 서려있다. 〈시씨 - 1부〉는 둘의 결혼식과 함께 끝을 맺는다.
이어지는 〈시씨 - 2부〉에서 시씨는 황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잠옷을 입고 쉔부른 궁을 거닐고, 조피 대공비가 준비한 교육 과정에 질식할 듯한 기분을 느낀다. 화려하지만 삭막한 궁에서 시씨를 유일하게 지켜주는 기반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보내는 신혼 생활과, 헝가리어 교육뿐이다. 헝가리어 교사와 친밀하게 지내면서 먼 나라에 대한 환상을 펼치던 시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아이를 임신을 하고, 딸을 순산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는 황제와 황후의 장녀에게 본인의 이름과 같은 조피라는 이름을 붙이고, 모친인 시씨가 아직 아이를 키우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명목으로 손녀의 아이방을 시씨의 침실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의 방 옆으로 옮긴다. 자신을 위해 나서지 않는 남편에게 실망한 시씨는 비밀리에 고향인 바이에른의 포센호펜으로 돌아간다.
왕궁의 시씨(로미 슈나이더), 〈시씨 - 2부〉(1956) [출처: DoBlu.com]
바이에른의 자유로운 환경, 그리고 부모의 애정은 시씨가 그리워하던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부모는 시씨를 타일러 프란츠 요제프와 화해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직접 바이에른까지 온 황제는 시씨와 화해를 하고, 바로 비엔나로 돌아가는 대신에, 그녀에게 바이에른만큼이나 아름다운 오스트리아의 자연풍경을 보여주겠다며 즉흥적으로 알프스 여행에 나선다. 허름한 시골 여인숙에서 위장 여행을 즐기는 젊은 연인의 모습은 〈시씨 - 1부〉에서 그들이 처음 만났던 바트이슐의 자연적 활력이 존재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영화적 이미지가 연상이 된다. 20년도 전에 그레타 가르보가 연기한 〈퀸 크리스티나〉의 '방의 암기'가 연상되는 자유가 바로 대상이다.
〈퀸 크리스티나〉의 스웨덴 시골 눈 덮인 여인숙, 〈시씨 - 2부〉의 알프스 산맥 눈 덮인 여인숙에서는 공통적으로 인간이 가장 자연스럽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어떠한 부귀영화나 신분적 권위보다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청량하고 깨끗한 겨울 아침의 공기에 담아 전달한다. 물론, 현대의 냉소적인 관객들은 크리스티나 국왕, 엘리자베트 황후가 느끼는 자유가 그들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락한 사회적 위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반론할 수도 있지만,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행복한 탈출 이후에 쉔부른 궁에 돌아오자, 황제에게 자신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면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통보한다. 황제는 그녀에게 황후의 신분으로 헝가리 사절단을 부부로 함께 접견해달라 요청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잠시 동안 누렸던 자유를 더욱 크게 갈구하고 있다.
접견 직전, 헝가리의 친-오스트리아 진영을 대표하는 언드라시 줄러 백작(월터 레이어)은 황후를 비밀리에 만나, 헝가리인들의 권리,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일이 불러올 평화를 위해 접견장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부탁마저 거절한 시씨지만, 마지막 순간 마음을 돌려 접견장으로 향하고, 그녀의 참석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통일 논의가 가속화된다. 한편, 시씨의 모친 루도비카 공비는 비엔나로 향해 언니인 조피 대공비에게 시씨에게 아이 양육권을 돌려주기를 설득하고, 조피 대공비는 고민 끝에 제안을 수락한다. 〈시씨 - 2부〉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로 향해 헝가리의 국왕과 왕비로 대관식에 참석하는 프란츠 요제프, 시씨 부부의 모습을 비추며 끝난다.
시씨(로미 슈나이더), 언드라시(월터 레이어), 프란츠 요제프(칼하인즈 봄), 〈시씨 - 2부〉 [출처: DoBlu.com]
〈시씨 - 3부〉는 비엔나의 숨 막히는 황궁에서 벗어나, 헝가리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시씨의 모습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휴가는 언드라시 백작이 자신이 시씨에게 품은 연모의 감정을 고백하면서 끝이 나게 되고, 그녀는 비엔나로 돌아온다. 한편, 부인이 헝가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진 프란츠 요제프는 시씨를 방문하러 헝가리로 향하고, 부부는 국경의 한 여인숙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서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바로 궁으로 돌아가는 대신, 둘에게 있어 기원적 장소인 바트이슐로 여행을 계획하지만, 여행 도중 시씨의 결핵 증상이 악화되면서 아쉽게도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의사는 시씨의 상태가 몹시 좋지 않다는 진단을 내리고, 프란츠 요제프는 시씨를 더운 지방인 마데이라로 보내 요양을 하도록 조치를 취한다. 좋은 기후에도 불구하고 호전되지 않던 시씨는 모친인 루도비카 공비의 방문과, 모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녀에게 주는 심리적 안정감으로 건강을 되찾게 된다. 프란츠 요제프는 시씨의 병세가 완전히 나았다는 소식을 듣자 단숨에 그녀를 만나러 가려 하지만, 귀족들과 조피 대공비는 시씨에게 휴식을 주는 대신 황제 부부가 함께 최근 오스트리아가 합병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공식적으로 순회하기를 제안한다.
시씨(로미 슈나이더), 벨레가르드 백작부인(센타 웬그라프), 〈시씨 - 3부〉(1957) [출처: DoBlu.com]
하지만 이탈리아 국민들은 외국의 황제에게 호전적인 기세를 내비친다. 이탈리아의 귀족들 또한 황제 부부에게 모욕을 주려고 황제가 참석하는 오페라에 저택의 하인을 대신 보내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조세프 헤이든의 반주가 시작되자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의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장난을 친다. 하지만,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프란츠 요제프와는 달리, 시씨는 베르디의 합창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오페라가 끝나자 귀족 대신 참가한 하인들을 접견장에 초대해 그들을 보낸 귀족 이름으로 대신 부르면서 슬기롭게 대처한다.
부부는 베네치아에 도착해 유람선을 타고 산 마르코 광장으로 향하지만, 베네치아의 시민들은 〈시씨 - 1부〉에서 다뉴브 강가에 무리 지어 그녀를 환영하던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황제 부부가 배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문을 닫거나 이탈리아 국기를 내거는 등 쌀쌀맞게 대한다. 고요함이 흐르는 산 마르코 광장에 도착한 황제 부부 앞에 나타난 아이는 바로 둘의 딸 조피였다. 오랜 시간 동안 딸을 보지 못한 시씨를 배려해 그녀를 놀라게 해주려 한 프란츠 요제프의 선물로, 시씨는 방문의 목적과 자리가 요구하는 격식은 상관하지 않고 어린 딸을 안아 애정을 표한다. 그리고 그녀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얼어붙어있던 이탈리아 국민들의 마음을 녹이고, 황제 부부를 진심으로 맞이하면서, 〈시씨 - 3부〉, 《시씨 3부작》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만약 4부가 제작되었다면, 마리슈카 감독이 그녀의 불행했던 여생을 다룰 계획을 세웠는지는 알 길이 없다. 《시씨 3부작》은 현대에 와서 보자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피엔딩을 위한 각색을 했다. 고증적으로 보자면, 시씨의 장녀 조피는 헝가리에서 여행 중에 병이 들어 2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시씨는 자신이 무리하게 아이를 데리고 다녀서 그런 비극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남은 자녀들의 교육을 완전히 포기한다. 때문에 조피 대공비에게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장남 루돌프는 부친인 프란츠 요제프와의 갈등, 자신을 외면한 모친에 대한 원망, 그리고 황태자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행동양식 등에 질식한 나머지, 마리 폰 베체라 여남작이라는 정부와 함께 권총으로 동반자살을 한다. 이 사태는 그들이 목숨을 끊은 장소에서 따온 마이어링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시씨는 남은 여생 상복만을 입고 자신 인생의 모든 비극의 근원인 비엔나를 떠나 여행을 다니다 제네바에서 암살당하고 만다.
황녀 조피, 시씨(로미 슈나이더), 〈시씨 - 3부〉 [출처: DoBlu.com]
이러한 역사를 알고 본다면 슬픔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간 황후의 삶을 밝게만 그려낸 《시씨 3부작》은 무책임하다는 감상이 들 수도 있다. 각색의 수준만을 보았을 때, 3부작은 역사극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역사에서 영감을 받은 동화, 디즈니 애니메이션 수준의 재창작이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가 없다. 역사성, 혹은 사회적인 책임감을 완전히 방기한 듯한 영화가 왜 반세기가 넘게 지나도 인기를 끌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자리를 잡는다.
뮐러는 이에 대해, 3부작 내 느껴지는 고향 영화 특유의 생태주의적이고 회귀적인 감성이 시씨와 왕궁 사이의 갈등으로 서사-배경적 조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정치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서가 소시민적이고 인간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짐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평한다. 뮐러는 "역사는 더 이상 행동과 사건으로 이루어진 일원화된 서사, 연대기가 아니다. 위대한 인물과 영웅적 행적으로만 구성된 남성적 역사 대신, 프리즘과 같이 작은 행동과 소소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여성의 행동에도 할당이 가능한 역사가 써지고 있다"라고 설명하며, 이러한 역사에 대한 인색의 재배치가 통속적이라고 무시되는 고향 영화의 저력이라고 주장한다.
《시씨 3부작》의 서사를 이끄는 문제들을 다시 본다면, 1부의 갈등인 시씨와 언니 헬렌의 갈등은 헬렌이 내민 화해의 손길로 봉합되었으며, 2부의 갈등인 고부 갈등은 자매이자 사돈 관계인 루도비카 공비와 조피 대공비의 대화, 그리고 황후로의 책임감을 다한 시씨의 결단으로 회복되었다. 3부에서는 황후의 모습이 아니라 어머니의 모습을 보인 시씨의 진솔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적 매력의 발산으로 두 국가의 갈등이 회복되는 서사가 그려진다. 이러한 연출 및 각색은 어찌 보면 환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민들에게는 전쟁, 모험, 영웅담이 아니라, 대화, 인간적 매력, 자연으로의 회귀를 통한 문제의 해결 방법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으며, 《시씨 3부작》은 시대에 가장 필요했던 이야기였기에 극도로 키치한 감성에도 불구하고 독일어권 국가에 커다란 울림을 남길 수 있었다.
시씨(로미 슈나이더), 〈시씨 - 2부〉 [출처: DoBlu.com]
이를 가능하게 만든 영화의 구조는 언스트 마리슈카 감독의 연출과 서사에 기반해 있지만, 이 작품을 평작 이상, 시대정신의 일부로 끌어올린 연료는 제목이자 주인공, 16살의 로미 슈나이더였다. 자신의 실제 모친인 배우 마그다 슈나이더가 시씨의 어머니 루도비카 공비 역으로 함께 출연한 이 작품에서 로미 슈나이더는 순식간에 유럽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물론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아역 연기자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16살의 소녀에게 어떠한 인생의 경험이 있기에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연기를 하겠는가. 이 작품의 시씨는 16세의 로미 슈나이더 본인일 수밖에 없다. 다른 연기자들에 비해서 꾸밈없이 흥분된 기분을 그대로 큰 목소리로 전달한 소녀는 유년의 순수함과 희망으로 독일-오스트리아 국민들이 몹시 무겁고 거북한 질문을 마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시씨를 연기한 배우가 만약 로미 슈나이더가 아니었다면, 혹은 성인 연기자가 분장한 소녀였다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상적이고 대책 없이 낭만적인 메시지가 퇴색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렇기에 《시씨 3부작》은, 이러한 감성의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에, 가장 순수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배우를 통해 만들어진, 우연 중의 행운과도 같은 작품이다.
마침
본인이 연기한 크리스티나 국왕처럼 대중의 관심에서 완전히 자신을 숨기는 데 성공한 그레타 가르보와는 달리, 로미 슈나이더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넘어, 유럽을 대표하는 배우로 인기를 끌면서 평생 대중의 지독한 관심에 고생을 해야 했고, 4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안타깝게 요절했다. 은막 위에서 여왕, 왕비를 연기해, 실제 역사 인물의 얼굴과 상호 교환이 가능할 정도로 인기를 끈 두 배우가 은막 위에 남긴 얼굴을 보다 보면, 문득 바르트가 이야기한 무성영화의 전형적 배우(역할)에서, 유성영화의 종합적 배우(인간)로의 전환이 떠오른다.
이들이 연기한 인물들은 지도자와 공인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이고 싶어 하는 존재적 욕구 사이를 오가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한다. 가르보의 크리스티나, 슈나이더의 시씨가 단순히 화면에 기록된 이상적인 얼굴을 넘어 대중문화의 상징적 이미지로 자리 잡은 이유는, 대중이 왕실과 연예인에게 공통적으로 가지는 관음적 호기심을 대하면서 카메라 안에 갇혀 있는 연기가 아니라, 여왕을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 뒤에 존재하는 인간으로 진솔하게 대답해냈기 때문이다. 배우가 맡은 역할과 작품 밖의 삶이 융합되어, 관객은 이들이 왕관의 무게에 짓눌리는 순간 잠시나마 화면을 탈출하는 진실한 절망감에 젖어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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