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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Feb 27. 2022

대서사극, 죽음의 무도

〈제7의 봉인〉 × 〈킹덤 오브 헤븐〉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개의 시공간

(左) 〈데이 쉘 낫 그로우 올드〉(2018), (右)  〈1917〉(2019) [출처: Warner Brothers, Universal Pictures]


관객이 역사 영화를 관람하는 순간 3개의 시공간 축이 임의로 생성된다.


첫 번째는 당연히 영화 세계 내부에 존재하는 디제시스, 배경의 시공간이다.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 그중 인류가 지나온 과거, 그리고 영화가 성립되기 위해 유난히 그 시간과 공간이어야만 했던 어떤 특정한 세계가 이미지 내부를 위태롭게 지탱한다. 이 시공간은 다른 축과는 달리 고의성을 띄고 생성되었으며,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간에, 지정되어 형성된다. 두 번째 축은 이미지가 기록되었던 조형의 시공간이다. 영화의 창작자들은 카메라 프레임 밖에서 세계 안쪽을 바라보며 허구를 현실화하는데 무척이나 공을 들이고 있었을 테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도, 실제 디제시스를 지배하고 있는 물리의 제약은 이 조형의 시공간에 의해 생성된다. 다만, 이곳은 '여기, '지금'은 아니다. 세 번째 축은 이미지가 경험 및 소비되는 관람의 시공간이다. 이 관람의 시공간은 조형의 시공간과 그다지 멀지 않은 영화 제작 지역 근처의 극장일 수도 있고, 혹은, 아주 오랜 시간 후, 바다 건너 어딘가, 누군가의 자택일 수도 있다. 이 세 번째 시공간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축에 어떠한 제약을 가하지도 못하기에 일방적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축을 수용하지만, 한편 두 개의 축에 관한 담론을 사회 전반으로 확장시키면서 새로운 논의를 펼쳐가기도 한다. 바로 세 번째 축이 '여기', '지금'을 의미한다.


영화 이론가 비비안 섭책은 「할리우드 대서사극의 현상학」을 통해 역사 영화, 특히 '대서사극(Historical Epic)'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관람의 시공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논의하면서 비평의 중심에 끌어왔다. 섭책은 이러한 영화가 개봉하면서 어련히 따라오는 역사학자들과 평론가들의 조소와 조롱, 그리고 그러한 시선에 반발하듯 더욱 화려한 스펙터클과 고증을 철저히 무시한 연출로 '역사 영화'의 제작 및 개봉 자체를 '역사 사건'으로 브랜딩 하는 할리우드 창작자들의 태도를 두고, '대서사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비-역사 장르와는 구분되는 별개의 관계, 예컨대, '역사에 대한 영화'와 '역사를 만드는 영화'의 이중 경험을 제공한다 주장했다.


[사족. 섭책의 「... 현상학」은 본 기획의 뿌리에 위치한 이론인 만큼 추후 별도의 글을 통해 세부 논할 예정이지만, 본문에서는 글의 시작에 있는 학계의 반응만을 인용한다.]


여기서 문득 의아한 부분은, 섭책이 "미국 영화 비평과 역사학의 '진지한' 학자들"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역사 영화에 대해 내뱉는 조소였다. 학자들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기반으로, 영화 연출을 위해 과장되고 낭만화된 인물 묘사 및 영화가 가진 시간제한을 위해 환원화된 뉘앙스를 비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저명한 기자이자 작가인 사이먼 젠킨스 경은 『더 가디언』 지면을 통해 〈바이스〉(2018)를 비평하면서 '역사 영화'가 '역사'를 무시하면서 진실에 대한 공격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관객들로 인하여 사회 문제로 심화될 수 있다 비판했다. 젠킨스는 해당 칼럼에서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의 감독인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영화 내 어떤 부분은 사실이고 어떠한 부분은 아니다"라고 인터뷰하면서 역사 고증을 가볍게 다루는 듯한 태도에 대한 논란 제기 및, 심지어 셰익스피어가 『리처드 3세』를 집필한 후 실제 해당 역사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까지 3세기가 걸렸다는 발언을 하면서 근, 현대의 역사 영화의 해이해진 고증 기강을 문제 삼았다. 젠킨스는 "트럼프 같은 이들이 세계가 가짜 뉴스로 가득 차 있다고 비난하는 현시대일수록, 우리는 그에 반론하기 위해 진실에 대한 도구, 정의, 개념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역사를 가볍게 다루지 말아라', 혹은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역사를 도용하지 말아라'라는, 엄숙주의를 떠올리게 만드는 역사에 대한 경건한 자세가 잠재되어 있다. 물론, 굳이 파고들자면 엄밀한 의미의 '역사' 영화와, 역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성'을 지닌 픽션 영화를 구분해, 그에 따른 고증의 잣대를 달리 적용함이 옳겠지만,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과, 이를 받아들이는 대중과 평단 모두 어느 정도 이 선이 모호했으면 하는 바람을 무의식 중에 드러내고 있다.


창작자들이 역사와 픽션 사이의 의도된 모호함을 추구하는 이유는, '역사에 기반한' 영화 문맥이 제공하는 진위의 권력을 최대한 빌려오기 위함이다. 젠킨스가 비판을 가하는 〈바이스〉는 "다음의 이야기는 실화다. 또는, 딕 체니가 역사상 가장 비밀스러운 지도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범위에서 실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빌어먹을 최선을 다했다."라는 글과 함께 시작하며, 저스틴 커젤의 〈켈리 갱〉(2019)은 "다음의 모든 이야기는 다 진짜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진짜"만을 남겨 영화의 원제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True History of the Kelly Gang)〉를 표기한다. 실제 서부시대에 활동한 흑인 총잡이들을 기반으로 팀업 무비를 연출한 〈더 하더 데이 폴〉(2021)은 "이 이야기에 그려진 사건은 허구이지만, 이 사람들은 실존했다"라는 글로 작품의 목적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배경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일련의 사건의 사건에 함유된 의미가 조형, 관람의 시공간으로 과잉되는 경향에 집중해달라는 요청이 있다.


저스틴 커젤 감독, 〈켈리 갱〉(2019) [출처: FILMGRAB]


대중이 역사와 픽션 사이의 의도된 모호함을 추구하는 이유는, '역사에 기반한' 영화 문맥을 빌려와 진위의 권력을 차용해 현대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창작자들의 음험함을 지적하고, 비판하기 위함이다. 디즈니의 판타지 애니메이션에 기반한 무협영화 〈뮬란〉(2020)에 대해, 역사학자 켈리 해먼드는 CNN에 투고한 칼럼을 통해 고증 비판을 전개했다. 원작인 『화목란』이 북위를 건립한 선비족 지파인 탁발씨족의 시가인데, 디즈니의 실사 영화가 한족 중심의 역사를 확장하고, 신장 지역의 위구르족 탄압에 동조하고 있다면서 혹평을 내렸다.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깝게 연출된 잭 스나이더의 〈300〉(2007)이 역사학자와 영화 평론계에서 전방위로 받았던 고증 비판을 굳이 하나씩 풀어놓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비판은 중동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라는 사회 논란으로 확장됐다. 굳이 따지자면, 조형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창작자가 휘두르는 연출과 각색이 배경과 관람의 시공간으로 과잉되고 있음을 경계하는 움직임이다.


어차피, 영화를 만들어가는 이들과 받아들이는 이들이 고의로 역사와 역사성의 경계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유의미한 구분을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여기서 포착하게 되는 위화감은,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역사 및 역사성 영화에게는 어떠한 경계선이 요구되고 있다는 감상이다. 섭책은 이를 '대서사극'이라 불리는 장르의 숙명에 가깝게 보고 있는데, 지나간 역사를 역사 자체가 아니라 스펙터클로 재창조해 상품으로 패키징 하는 제작자들의 입장에서는 허용의 범주를 정의하는 경계선을 넘어가는 과잉의 정도가 마케팅을 위한 캐치프레이즈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왠지 (최소 이 글을 쓰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본능에 가까운 반응으로, 과잉이 심해질수록 영화에 대한 진지한 평가, 또는 비평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느끼게 된다.


이 부분에서 본능에 바로 잠식되기보다는, 도대체 무엇이 과잉되고 있으며, 과잉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감정의 복합이 어떠한 재료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일견, 작가의 입장에서 배경의 시공간에서 두, 세 번째 시공간으로 과잉이 되고 있는 무언가는 아마 역사의 사건이 지닌 탈시대의 시사점일 텐데, 이는 자국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차용되고는 하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 잉글랜드의 (셰익스피어가 재창조한) 헨리 5세를 주인공으로 한 중세의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잔 다르크의 경우, 그녀 인생 어떠한 부분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현대 세계에도 만연한 남성-여성, 혹은 종교계의 교조주의 체제를 지적하는 시사점이 과잉될 수도 있다.


이러한 역사의 탈시대성은 배경의 시공간을 가두는 한계를 넘어가는데, 어떤 관객의 입장에서는 과잉의 정도가 커질수록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인류가 다 같이 넘어온 과거의 시간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경험은 마치 오랫동안 잊혔던 거대한 나스카 지상화를 처음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본 비행기 조종사가 느꼈을 위화감과 유사하지 않을까. 이 때문에 본능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의 부조리를 찾기 시작한다. 조형의 시공간에 있는 작가의 의도가 과잉이 되어 배경의 시공간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느끼는 반응이다.


'과거에서 무언가 흘러넘치고 있다'라는 창작자와, '당신이 무언가 흘려보내고 있다'라는 관객의 대립은 이 과잉 과정 자체에 지속해서 변화하는 관계를 생성한다. 특히, 관람의 시공간은 계속 변경되고 재생성된다는 부분에서 더욱 그러하다. 중세 유럽 역사에서 독보적으로 종교-정치를 둘러싼 복잡한 역사를 일거에 논할 수 있는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미시사를 탐구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제7의 봉인〉(1957)과, 거시사를 연출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2005)을 통해 과잉의 미학과 역학을 조사해보려 한다.


잉마르 베리만에 대한 비평과 메타 비평

잉마르 베리만 감독 (1966) [출처: Wikimedia Commons]


잉마르 베리만 감독은 1918년에 스웨덴의 고도인 웁살라에서 태어나, 1940년대부터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영화, 텔레비전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담은 작품들을 공개해오며 스웨덴 영화계를 상징하는 위치에 올랐다. 그는 1960년대부터는 스웨덴의 파로 섬에 거주하면서 섬을 배경으로 해 다양한 작품을 촬영하기도 했고, 유작 〈사라방드〉(2003)를 공개한 지 4년 후인 2007년에 세상을 떠났다.


베리만의 유산은 그가 영화 활동을 마무리 지은 이후에도 영화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의 사망 이전, 스웨덴의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리 뉘레로드가 파로 섬에 방문하여 베리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품 세계를 돌아본 〈베리만 아일랜드〉(2006)를 공개하였으며, 10년 후에는 베리만의 작품에 나타나는 결혼관에서 영감을 받아 스웨덴의 영화감독 미아 한센 로브가 배우 미아 와시코우스카와 팀 로스를 주연으로 캐스팅해 파로 섬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2021)를 연출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2018년, 고전영화의 명가인 크라이테리온에서는 베리만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잉마르 베리만의 시네마》라는 제목으로, 그의 회고전이 될만한 영화제를 모티브 삼아 39개 작품에 달하는 그의 전 작품을 박스세트로 출시했다. 크라이테리온은 《잉마르 베리만의 시네마》를 소개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가장 통찰력 있는 창작자 중 한 명인 베리만은, 냉혹한 완강함과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위한 진솔한 추구로 세계를 놀라게 만든 위대한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렇지만 그의 사후 15년이 넘은 지금은, 베리만의 사후에 영화 비평계에 소소한 논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대중의 기억에서 잊혔다. 유명 영화 평론가인 조너선 로젠봄은 베리만이 세상을 떠난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은 2007년 8월 4일, 『뉴욕 타임스』 지면의 칼럼을 통해 베리만 감독의 작품 〈결혼의 풍경〉(1973)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따온 「과대평가된 경력의 풍경」이라는 기사를 발표했다. 로젠봄의 제목이 워낙 유난스럽게 뽑힌 나머지 논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사실 로젠봄에 앞선 7월 31일, 『옵서버』의 평론가 앤드루 새리스는 "나는 〈페르소나〉(1966) 훨씬 이전 베리만 밴드왜건에서 뛰어내렸다"라고 평하며 베리만에 대한 과대평가가 존재한다는 견해를 먼저 펼쳤다.


로젠봄과 함께 미국 영화 평론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로저 이버트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 발끈하면서 곧바로 (다소 감정 섞인) 반론을 발표했다. 이 외에도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오웬 글라이버맨과 영화 잡지 『프리미어』의  평론가였던 글렌 케니가 로젠봄의 글에 반박하면서 베리만의 사후 평가에 과열된 양상이 펼쳐졌다. 로젠봄은 이들의 글에 재반론을 펼치기도 했지만 논란은 곧 사그라들었다.


14년이 지난 2021년에야, 로젠봄은 본인의 웹사이트에 『뉴욕 타임스』에서 본인 칼럼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던 마크 로토가 3번의 수정을 요구하기 전의 내용을 담은 기사의 초고를 공개했다. 로젠봄은 「과대평가된 경력의 풍경」이라는 제목 또한 본인의 작품이 아니었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의 초고에서도 로젠봄이 견지하는 베리만 과대평가에 대한 경계는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로젠봄은 베리만의 작품이 "소수 철학자의 사상을 확장시키기보다는 요약하는데 그쳤고 …", 심지어 〈사라방드〉에서는 영상, 혹은 영상을 만들어내는 카메라 자체를 기록을 위한 도구 이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해석했다. 베리만의 작품에 녹아있는 인간성에 대한 "형이상학의 추측"이 "신경질 섞인 응어리"에 가까울 정도로 우울하지만, 그의 무심하고 관조적인 촬영과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가 뉴욕의 아트하우스 관객의 니즈에 맞아 우연에 가깝게 예술 작품으로 평가된다는 감상이다.


흥미롭게도, 베리만 생전에도 이러한 상반된 평가가 공존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페르소나〉 개봉 이후, 수전 손택은 해당 작품에서 베리만이 카메라와 필름 자체의 존재를 영화를 경험하는 관객에게 시작, 중간, 끝에 여러 번 공표함으로, 카메라를 통해 인간의 심연을 파고든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위험성, 혹은 과정의 자멸성을 경고하고 있다고 해석하면서 영화를 호평했다. 한편, 동시대의 새리스는 앞서 논했듯이 『빌리지 보이스』에 같은 작품을 평하면서 "베리만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본능의 친밀감을 보여주지도 않은 채 27개의 작품을 공개해왔다"라고 주장하고, "그의 방식은 긴장되어 있고, 파생적이며, 만연하게 상징적이거나, 둔감하게 모호하다"라고 일축했다. 새리스는 〈페르소나〉의 모호함에 대해 여러 번 본다고 이해되는 성질이 아니며, 베리만이 단순히 대답하지 않기를 선택했기에, 굳이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 없다고 보고 있다.


베리만의 작품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수사학 표현을 모두 걷어내고 본다면, '결핍'이라는 감상으로 수렴한다. 새리스가 베리만 사후 『옵서버』에 발표한 부고는 베리만이 본인이 생각하는 거장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보통 현실에 순응하는 체념으로 끝나기 때문이라고 끝을 맺는다. 새리스는 이에 대해, 베리만이 파로 섬에 정착한 이후, "자신의 정신의 섬"에 갇혀 버려 그의 창작 세계가 점멸(漸滅)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상상한다. 새리스와 로젠봄에게는 베리만이 던지는 질문과 그가 도달하는 답 사이에 만족스럽지 않은 골짜기가 존재하며, 이 결핍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만약 로젠봄과 새리스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베리만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대답의 불완전함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능력의 한계다'라는 공격적인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베리만의 〈제7의 봉인〉은 (비록 엄밀한 의미의 '대서사극(Historical Epic)'이 아닐지라도) 역사 영화에서 드러나는 '과잉'의 미학과, 베리만 감독 본인이 받고 있는 '결핍'의 평가를 모두 논하기에 적합한 작품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베리만 감독은 분명히 〈제7의 봉인〉에서 중세 유럽에서 흘러나오는 무언가를 포착해 카메라에 담거나, 무언가를 흘려 내보내고 있을 테고, 관람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우리가 광경을 보며 어떤 결핍을 느낄 수 있다면, 부조리 간에 창작자와 관객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의 뒤틀림을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제7의 봉인〉, 도덕 게임

(左) 안토니우스 블로크(막스 폰 시도우), (右) 사신(벤트 에케로트), 〈제7의 봉인〉(1957) [출처: FILMGRAB]


〈제7의 봉인〉은 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 지구의 종말을 다룬 8장 1-2절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한다. 스웨덴의 한 해변에서, 자갈밭에 늘어진 기사 안토니우스 블로크(막스 폰 시도우)와, 그의 시종 욘스(군나르 뵈른스트란드)의 모습과 함께 시작된다. 고향을 돌아가려는 안토니우스의 앞에 사신(벤트 에케로트)이 나타나 그의 삶을 마칠 시간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안토니우스는 사신에게 자신을 바로 죽이는 대신 함께 체스를 두자고 제안을 한다. 삶의 의미, 신의 존재를 찾는 기사에게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체스를 즐기는 사신은 그의 제안에 응하고, 둘은 해변가에서 안토니우스의 목숨을 건 체스 게임을 시작한다.


무척 유명한 오프닝 시퀀스지만, 이 장면을 감상할 때마다, 안토니우스와 욘스가 누워 있는 자갈의 해변이 무척이나 불편해 보이고, 나아가서는 인위적이라는 감상을 금할 수가 없다. 욘스의 자세는 영화 시작 직전에 어떤 배가 난파당한 후, 파도에 밀려 해변에 도달한 표류자와 유사하다. 달리 말하자면, 안토니우스와 욘스가 누워있지 않은, 멀리에 사신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자갈 해변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감상이다. 이 세계 전체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조립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어울릴까. 이 기묘한 역사 영화는, 인류가 지나온 과거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 배경을 상상함이 아니라, 영화의 시작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독자의 역사를 구축하고 있으며, 등장인물의 여정만을 위해 존재한다.


물론, 영화를 연출한 베리만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는 중세 배경의 판타지 게임들이 시작하는 형태를 떠올리게 만든다. 예컨대 주인공들은 사용자가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이 어떠한 장소에 표류하면서 게임이 시작된다. 한편, 시작과 함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내레이션은 어떠한가. 게임 진행의 느슨함을 타파하기 위해, 사용자가 주인공을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세계의 파멸이 다가온다는 경고, 혹은 예언이 떠오른다.


안토니우스는 사신과의 체스 게임을 시작함으로, 눈앞에 닥쳐온 죽음을 잠시 미뤄두는 데 성공하고, 욘스와 함께 해변을 떠난다. 욘스는 고향으로 향하는 여정을 출발하며 지리를 파악하기 위해 길가에 누워 있는 한 사내에게 말을 거는데, 이미 전염병(아마 흑사병)에 걸려 죽은 시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영화의 시작에 우리가 들었던 종말은 어쩌면 세계를 멸망시킬 전염병일 수도 있다. 다만, 두려움에 빠지기보다는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한 후, 건조한 농담을 통해 안토니우스에게 보고하는 욘스의 모습에서는 형이상학 딜레마에 빠진 기사와 달리 현실주의자 종자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카메라는 스웨덴 목가의 평야에서 하루 밤을 보낸 유랑극단의 마차로 옮겨가며,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들을 소개한다. 낙천적인 배우이자 저글러인 요프(닐스 포페)는 아내인 미아(비비 안데르손), 어린 아기인 아들 미카, 그리고 서커스의 단장인 요나스 스캇(에리크 스트란드마르크)과 함께 스웨덴 각처를 떠돌며 코미디 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요프는 아침에 일어나 아내인 미아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멀리서 아기 예수를 데리고 가는 성모 마리아의 환영을 본다. 미아는 요프가 보는 환영을 볼 수 없으며, 그의 이야기가 남들에게는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다고 타박을 주면서도, 부부는 서로를 깊게 사랑하고 있다. 관객은 이 가족이 이 전염병이 창궐한 세계에서 핍박을 피해 돌아다니는 신약성경의 나자렛의 요셉, 성모 마리아, 예수와 무척 닮아있으며, 유일하게 남아있는 순수함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요프(닐스 포페), 미아(비비 안데르손), 〈제7의 봉인〉 [출처: FILMGRAB]


〈제7의 봉인〉을 구조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설정과 레퍼런스는 이쯤 해서 충분히 제공됐다. 전염병이 도는 중세이니, 아마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을 겪고 있는 중세의 스웨덴이 무대라고 추측되며, 흑사병을 피해 어디론가 여정을 떠나는 여행자들은 형이상학 질문에 고뇌하는 기사, 실존주의로 세계와 대립하는 종자, 약간 모자라 보이는 몽상가 광대, 순수한 성녀에 가까운 광대의 아내, 아기 예수, 그들을 쫓는 의인화된 죽음으로 구성되어 도덕극(Morality Play)의 캐스트를 완성한다. 영화와 같은 시대, 멀리 떨어져 있는 남유럽의 이탈리아에서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똑같이 흑사병을 피해 도망가고 있을 터이며, 바다 건너 잉글랜드에서는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순례를 떠난 기사와 종자, 승려와 방앗간 주인 등이 서더크의 타바드 여관에 모여 밤마다 돌아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테다. 레퍼런스가 되는 두 작품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해본다면, 베리만 감독은 보카치오와 초서에 대응하는 작가의 야심을 내비쳤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본 영화의 서사가 기원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예고를 관객에게 보내고 있다.


여정을 떠난 안토니우스와 욘스는 작은 교회에 도착한다. 욘스는 교회의 별실에 들어가 벽화를 그리는 화가와 대화를 나눈다. 화가는 별실의 벽에 커다란 낫을 들고 있는 사신이 망자들을 이끄는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를 그리고 있는데, 욘스가 그에게 왜 이런 우울한 그림을 그리냐고 질문하자 화가는 왜 예술이 항상 관객을 기쁘게 해야 하는지 반문하면서, 흑사병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그리면서 관객에게 죽음의 공포를 전달하는 행위 또한 중요하다고 투덜거린다. 베리만 감독은 화가의 입을 통해 〈제7의 봉인〉이라는 작품을 만든 의도를 전달하고 싶었을까. '죽음의 무도'를 그리는 예술가는 영화의 말미에 다시 한번 연출된 장면으로 돌아오게 된다. 욘스는 '죽음의 무도' 맞은편 벽에 그려진 고행자들의 벽화를 보고는 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화가는 흑사병이 신의 벌이라고 믿는 이들이 자신들을 일부러 채찍질해가며 전국을 유랑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예배당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질문을 신부에게 묻는다. 십자군에 종군하면서 직접 확인한 전쟁의 참혹함에서 도망치듯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 땅에는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창궐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인간에 대한 불신, 혹은 무관심으로 가득 차 세계를 질식시키는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이끌어줄 절대자, 신은 오감의 확신을 그에게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안토니우스는 신에 대한 갈구를 멈출 수 없는가. 안토니우스는 신부에게 자신이 사신과 체스를 두면서 번 시간을 사용해, 삶에 마지막 의미를 찾고 싶다고 고해한다. 그는 신부에게 사신을 상대로 사용할 전략을 알려주고, 신부는 답을 들은 순간 안토니우스에게 돌아 얼굴을 보이며, 자신이 바로 사신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안토니우스는 욘스와 함께 교회를 떠나면서 악마와 관계를 맺어 흑사병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죄로 체포된 젊은 마녀(마우드 한손)를 만난다. 머리가 짧게 잘린 여성은 정말로 악마를 보았냐는 안토니우스의 질문을 무시하고는 기괴한 신음소리를 내뱉을 뿐이다. 안토니우스는 성당에서 자신의 고백과 같이 무관심하게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떠난다.


안토니우스와 욘스는 흑사병으로 인해 주민이 모두 죽은 마을에 들어선다. 욘스는 두 사람이 전쟁을 떠나기 전 인연이 있었던 성직자였지만, 이제는 좀도둑으로 전락한 라발(베르틸 안데르베르크)을 만나 응징하고, 그가 괴롭히고 있던 벙어리 여인(건넬 린드브롬)을 구출한다. 욘스는 벙어리 여인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고 여인은 그를 밀어낸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와 욘스가 마을을 떠나는 모습을 보자, 안전을 위해 그들을 따라나선다. 사회의 약자 중 가장 하위에 위치한 장애를 가진 벙어리 여인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여성성을 담보 삼아 폭행을 감수하는 삶을 선택한다는 비극이 서려있다. 한편, 영화 내 어느 정도 정의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온 욘스가 잠시나마 벙어리 여인을 탐하는 이 행위는 다분히 위악스런 구석이 보인다. 그는 적어도 신이 부재하거나, 신이 자신과 이 세계를 버렸다는 사실에 순응하고 있으며, 순간순간의 욕구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도착한 마을에서는 요프와 미아, 스캇이 마을 사람들의 야유를 들으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스캇은 공연 중간에 대장장이 플로그(아케 프리델)의 아내인 리사(잉가 길)를 유혹해 달아나고, 요프와 미아의 공연이 어떻게든 공연을 이어나가려 하지만, 마을에 고행자 무리가 들어서면서 남아있던 유흥의 분위기는 모두 사라진다. 안토니우스와 욘스, 벙어리 여인, 그리고 요프와 미아는 모두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행자들을 이끄는 성직자의 기도, 그리고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본다. 만약 신이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죽음의 전염병으로 저주했다면, 그에게 죄를 사하기 위해 죽음과 유별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삶과 죽음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광대 요프는 혼자서 여관에서 식사를 하다가 대장장이 플로그와 좀도둑 라발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다행히 욘스가 그를 구출한다. 한편, 기사 안토니우스는 공연이 끝난 후 쉬고 있는 미아와 아기 미카를 만나고, 둘은 대화를 시작한다. 곧 요프와 욘스가 마을에서 돌아오고, 미아는 본인들도 부족한 살림이지만 자신의 남편을 도운 욘스와 친절하게 대해준 기사 안토니우스를 위해 우유와 산딸기를 식사로 함께 나눈다. 석양이 지는 평야에서 잠깐의 평화를 느낀 안토니우스는 그 순간이 자신이 찾고 있었던 안식임을 깨닫는다. 피하지 못하는 죽음에서의 도망, 혹은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반강제의 선택이 아니라, 살아가는 순간을 적극 수용하고, 자의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순간, 안토니우스는 갈구하고 있었던 삶의 의미, 혹은 조각을 확인하는 데 성공한다.


(左) 고행자 무리, (右) 미아가 제공한 우유를 마시는 안토니우스, 〈제7의 봉인〉 [출처: FILMGRAB]


이들 일행은 대장장이 플로그를 일행으로 받아들이고, 숲을 지나면서 유랑극단장 스캇과 바람을 피워 도망간 그의 아내 리사와 다시 만나게 된다. 리사가 플로그에게 돌아가자 스캇은 자살을 하는 척하면서 위기를 넘기지만, 곧 그를 찾아온 사신과 만나 죽음에 이른다. 일행은 곧 숲의 한 공터에서 마을에서 만났던 젊은 마녀를 화형 하러 온 군인들과 조우한다. 죽기 직전 그녀에게 다가가 안토니우스는 혹시 자신도 악마를 만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안토니우스는 악마라면 신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고 있다. 마녀는 자신의 눈을 바라보면 악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 대답하지만,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눈에서 극심한 두려움만을 확인한다. 마녀는 끝까지 악마가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고 발악하지만, 화형장에 불이 붙으면서 신도 악마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타오르는 마녀를 바라보며 욘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이 세상에는 천사도, 신도, 악마도 없으며, 공허만이 인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라고 조언한다. 앞서 잠시나마 삶의 희망을 보았던 안토니우스는 마녀의 대답으로 만족할 수 없다.


화형장을 떠난 일행은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좀도둑 라발과 마주친다. 라발은 흑사병에 걸려 고통 때문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고 있다. 죽음의 손길이 일행의 여정을 따라잡고 말았다. 안토니우스는 그날 밤, 자신을 찾아온 사신과 체스를 둔다. 최대한 수를 천천히 두거나, 체스판을 뒤집으면서까지 그는 게임을 끝을 내지 않으려 한다. 한밤 중에 잠에서 깬 요프는 안토니우스와 체스를 두고 있는 사신을 확인하고, 아내 미아를 깨워 장소에서 도망친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체스로 벌어낸 며칠 간의 시간으로 이 세상에 남아있는 순수함을 구하는 데 사용했음에 만족하고, 사신의 체크메이트를 받아들인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도망친 요프와 미아 가족을 제외한 일행은 안토니우스의 성에 도착한다. 고향에서 10년 동안 안토니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의 부인 카린(잉가 랑드그레)과 재회하지만, 짧은 만남이 끝나고 성까지 쫓아온 사신과 만나 죽음에 이른다. 일행은 각자 다른 태도로 죽음을 맞이한다. 카린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죽음 앞에서도 귀족의 예의를 잃지 않고, 플로그와 리사는 자신들의 삶을 담담하게 소회 한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았음에도,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 앞에서는 다시 한번 신을 찾으며 눈물을 흘리고, 욘스는 그런 안토니우스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으니 당당한 무관심으로 죽음을 맞이하라 조언한다. 벙어리 여성은 죽음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환한 미소와 함께 무릎을 꿇는다. 다음날 아침, 요프와 미아, 미카는 폭풍우가 지나가고 맑게 개인 하늘 아래 깨어난다. 먼 언덕을 바라보던 요프는 사신을 따라 '죽음의 무도'를 추며 나아가는 일행을 바라본다. 그는 자신이 보는 환영을 미아에게 묘사해주지만, 미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가볍게 타박한다.


'죽음의 무도 (Danse Macabre)', 〈제7의 봉인〉 [출처: FILMGRAB]


안토니우스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까지 지고의 선을 위해 희생하면서 신에게 자신의 오감을 통해 현신해 달라 간구하고 있었지만, 결국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죽어버렸고, 요프는 살아 있는 모든 순간 신의 흔적을 환영으로 경험하고 주위에 떠벌렸으나,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 베리만 감독이 신의 존재에 대해 내린 결론은 여기까지다. 신의 존재란 간구한다고 얻어지는 성질이 아니며, 누군가는 평생 그를 쫓아가도 닿지 못하지만, 그를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또렷하고 명료한 진실이다.


본 작품을 중세 스웨덴이라고 임의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실제 스웨덴 왕국이 핀란드와 러시아를 향한 십자군 원정을 떠났는지는 아직도 학계에서 논란이 있는 부분이며, 만약 원정이 존재했다면 12세기, 혹은 13세기 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그런데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고, 마녀사냥이 성행했던 시기는 14세기였기 때문에, 〈제7의 봉인〉이 역사적으로 성립하기에는 시대 배경에 고증 오류가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베리만 감독은 스웨덴의 과거의 어떠한 특정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의 베리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과거의 어떤 순간들을 빌려와 짜깁기해, 임의의 시공간을 창조해냈다. 신을 위한 전쟁을 떠났지만 신앙을 잃고 돌아온 주인공을 등장시키기 위한 십자군 전쟁과, 세상을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기 위한 흑사병이 조합되어, 신앙을 잃은 이가 닥쳐온 죽음 앞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하는 도덕극으로 거듭난다.


〈제7의 봉인〉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너무나도 적나라해서 때로는 작품이 굳이 영화일 필요가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 들기도 한다. 베리만 감독이 선택한 도덕극(Morality Play)이라는 장르 자체가 인간이라기보다는, 추상화된 개념이 인물로 등장해, 개념 간의 대화와 역학 변화에 대한 고찰을 주문하는 만큼, 영상보다는 지면 위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물론 14세기에 시작되어 현대에 와서는 거의 창작되고 있지 않은 작품의 형태 때문에 고루해 보이는 효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제7의 봉인〉은 이러한 위화감 때문에 어딘가 묘하게 삐걱거린다. 안토니우스가 사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신의 존재와 기능에 대한 직접 도전이고, 그에 답하기 위해 영상을 상징과 기호로 가득 채워 독서에 가까운 경험을 제공한다. 또한, 이 역사 세계가 베리만의 질문 자체에 답하기 위해서만 성립한다는 감상 때문인지, 관객이 질문에 얼마나 공감하는지에 따라 세계의 균형감이 달리 느껴진다.


우리가 이 작품에서 느끼는 '결핍'이 존재한다면 이는 베리만이 던지는 질문의 무게감이 대답을 짓누르고 있다는 감상이 아닐까. 베리만 감독은 작품에서 안토니우스와 욘스로 대표되는 두 인물의 태도로 신의 부재를 마주하는 태도를 제시한다. 안토니우스의 침울한 고뇌가 여정을 지배하지만, 마지막 순간, 죽음 앞에 가장 담대한 인물은 실존주의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는 욘스였다. 다만, 베리만의 작품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페이슬리 리빙스턴은 실제로 베리만의 철학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학자는 핀란드의 실증주의자인 에이노 카일라였지만, 카일라의 작품이 북유럽 외에 소개가 될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이 대개 유럽의 주류 철학자의 사상 안에서 분석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리빙스턴에 따르면 카일라는 인간의 의도, 갈망, 필요가 그들의 이성과 신념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는데, 이 담론 안에서 〈제7의 봉인〉을 바라본다면 베리만의 중세는 '신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욕구'가 신의 실재성을 뒤덮어 버린 시대이다. 죽음의 기운이 이 세계를 가득 채워, 화면을 넘어 관람의 시공간으로 흘러들어올 만큼 팽창하면서, 대부분 신의 부재에 대해 절망하거나, 위악스런 무심으로 절망을 숨긴다. 죽음에 너무나 경도된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잊어버린다.


욘스(군나르 뵈른스트란드), 〈제7의 봉인〉 [출처: FILMGRAB]


신을 볼 수 있어서 (혹은 볼 수 있다고 철저하게 자신을 기만할 수 있어서) 세계를 질식시키고 있는 죽음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들은 몹시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의 신앙 체험이 진실한지는 딱히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니다. 그들은 시대의 비극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이러한 운이 허락되지 않고, 어느 순간, 신을 만나지 못하고, 삶의 의미에 대한 어떠한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 그의 손에 끌려 세상을 떠나야 한다. 세상을 떠나는 우리의 모습은 만족스러운 춤사위일까, 후회로 가득 차 허덕이며 끌려가는 더딘 발자국일까, 혹은 의연한 무관심일까.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짧은 '죽음의 무도'가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옴은, 영화 내 끌어온 무겁고 적나라한 질문을, 영화에서만 가능했을 형태로 연출한 대답의 순수함 때문이다. 죽음에게 끌려가는 망자들의 몸짓은 그들이 살아간 짧은 삶에 대해 베리만이 보내는 경의의 표시이다.


리들리 스콧의 역사관

올리버 마크 作, 리들리 스콧 감독 (2005) [출처: Wikimedia Commons]


아마 섭책이 논하던 대서사극 영화는 베리만의 〈제7의 봉인〉보다는 리들리 스콧의 〈킹덤 오브 헤븐〉에 훨씬 가까웠으리라 생각한다.


개별 작품에 대한 평이 갈릴 수는 있지만, 스콧 감독은 21세기에 와서도 세실 B. 드밀, 앤서니 만, 스탠리 큐브릭으로 이어져 오는 계보의 대서사극 장인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그의 데뷔작 〈결투자들〉(1977)부터가 19세기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에일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라는 SF 걸작을 연이어 연출하고, 몇 년 후에는 〈델마와 루이스〉(1991)로 영화계에서 명성을 공고히 한 스콧 감독은 다시 대서사극 장르로 돌아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를 주제로 한 〈1492 콜럼버스〉(1992)를 야심 차게 공개했지만 미국 내에서는 흥행에 실패한다. 이후 〈글래디에이터〉(2000)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면서 다시 한번 할리우드에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액션 '칼과 샌들 (Sword-and-Sandal)' 장르 붐을 일으키고, 러셀 크로우를 A급 리딩맨의 위치로 올린다. 극장 개봉 시에는 미묘한 평가를 받았지만 감독판 공개와 함께 그의 대서사극 중 최고라는 평을 받은 〈킹덤 오브 헤븐〉(2005), 러셀 크로와 다시 만난 〈로빈 후드〉(2010), 성경의 출애굽기를 배경으로 한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 중세 시대 마지막 법적 결투 재판을 다룬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2021)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배경으로 한 블록버스터 대서사극은 SF와 함께 스콧 감독을 상징하는 장르이다. 2022년 현재 그가 제작에 돌입한 〈나폴레옹〉 또한 그가 존경심을 표현해 마지않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숙원과도 같았던 작품이자, 45년 전의 데뷔작 〈결투자들〉과 같은 시대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스콧 감독 본인이 해당 장르에 대해 무척이나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左) 〈결투자들〉(1977), (中) 〈1492 콜럼버스〉(1992), (右) 〈글래디에이터〉(2000) [출처: IMP Awards]


하지만 스콧 감독의 작품들은 작품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고증에 대해서는 미심쩍은 시선을 받아왔다. 〈라스트 듀얼〉의 개봉 즈음에 『인디펜던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스콧 감독은 영화의 결투 장면을 위해 고증을 희생한 경위를 설명한다. 배우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면 영화를 상징하는 결투 중에 관객이 인물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리라 판단한 스콧 감독은 맷 데이먼과 아담 드라이버 두 주연 배우가 착용한 투구의 가리개를 반으로 잘라냈고, 제작에 참여한 역사학자가 "사실과 다르다"라고 반발하자, "이제 사실이다"라고 대답했다 술회한다. 심지어 그의 대서사극 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축에 속하는 〈글래디에이터〉를 기획할 당시에도 그는 딱히 고증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로마 제국을 재현하기 위해 어떤 자료를 공부했나"라고 질문하면 "전혀 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한다. 단지 몇 개의 사진을 보고 "만들어 보자"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스콧 감독은 미국감독조합이 발행하는 『DGA 쿼털리』와의 인터뷰에서 〈글래디에이터〉를 연출하게 된 계기는 각본을 읽기도 전 제작자인 월터 파크스가 보여준 화가 장 레옹 제롬의 〈폴리케 베르소 (Pollice Verso)〉(1872)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글래디에이터〉의 제작 중 역사 감수를 맡았던 하버드 대학교의 고전학 교수 캐슬린 콜먼은 기획 및 촬영 시에 고증을 위한 자신의 충고는 대부분 무시되었으며, 오히려 강렬한 비주얼을 위해 증거를 찾아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결국 촬영 종료 후 엔딩 크레딧에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영화 개봉 이후에는 「규칙주의자 할리우드에 가다 (The Pedant Goes to Hollywood)」라는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기도 했다. 해당 에세이를 포함해 〈글래디에이터〉 제작 비화를 취합한 『파이낸셜 타임스』의 기사는 〈라스트 듀얼〉의 투구 사건과 유사한 일화를 포함한다. (현대의 로마에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야외 카페 씬을 촬영하고 싶었던 스콧 감독에게 영화의 역사 자문위원들이 고대 로마에는 야외 카페가 없었다고 조언하자, 그는 마음대로 야외 카페 씬을 촬영해버린 후, "로마 역사 최초의 야외 카페"라고 선언했다.


(左) 〈로빈 후드〉(2010), (中)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 (右)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2021) [출처: IMP Awards]


이 일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투구 사건과는 다르게 스콧 감독이 역사를 대하는 의식을 무척이나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로마에서 야외 카페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다. 이 장면 자체는 스콧 본인, 즉 조형의 시공간에 살아가던 본인의 경험, 그리고 관람의 시공간에 살아가고 있는 관객의 경험에 기반한 감성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감성이 영화 내 존재하는 배경의 시공간으로 흘러들어 간다. 특정한 감성의 전달을 위해 그는 실제 배경이 되는 역사를 비트는 결정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


〈글래디에이터〉 이후, 3년 내 스릴러〈한니발〉(2001), 전쟁 영화 〈블랙 호크 다운〉(2001), 블랙 코미디 미스터리 〈매치스틱 맨〉(2003)으로 현대극 수작을 연달아 공개한 스콧 감독은, 2005년 〈킹덤 오브 헤븐〉으로 다시 대서사극으로 복귀한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예루살렘을 탈환한 기독교 연합군은 건국 이후 약 100년도 되지 않았지만, 살라흐 앗 딘이 이끄는 이슬람 통합군의 위협을 받아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슬람 군대에 맞서 예루살렘을 지켜내 기독교도들을 무사히 탈출시킨 이벨린의 발리앙의 일대기를 다룬 본 작품 또한 개봉 직후 〈글래디에이터〉에 야외 카페를 삽입했던 스콧 감독의 대범한 각색과 더불어, 영화의 서사 완급 및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성에 질타를 받았다. 가장 커다란 비판점은 기독교인에 대한 (다분히 현대의 시각에 기반한) 비판 논지를 설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악인으로 묘사된 성직자들, 영화의 극적인 서사를 위해 사생아 설정이 붙고 훨씬 젊게 묘사된 발리앙,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시빌라와의 불륜관계 등을 포함한 역사 상의 인물과의 차이였다. 스콧 감독이 조형의 시공간에서 배경과 관람의 시공간으로 흘려보내는 과잉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작품에 대한 혹평은 스콧 감독이 개봉 이후 배급사인 폭스의 요청으로 삭제된 장면 45분을 재삽입해 연말에 개봉하고 이듬해 비디오물로 출시한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으로 인해 완전히 뒤집혔다. 물론, 작품의 고증, 정확히 말해서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위해 무척 비튼 실제 역사와의 차이,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현대적인 사상을 지닌 주인공의 인물상 등은 여전하다. 하지만, 발리앙을 제외한 기타 인물들의 내면 묘사, 그리고 다양한 인물 간 거미줄처럼 펼쳐진 복잡한 관계가 설득력 있게 변화할 수 있도록 호흡이 가능한 공간을 내어준 스콧 감독의 재편집을 통해 영화의 평가가 번복되었고, 심지어 개봉한 지 15년이 지난 이후 2019년, 2020년에 와서도 『덴오브긱』, 『콜라이더』를 포함한 대중영화 매체에서도 스콧 감독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의 작품록이 앞서서 언급했듯이 장르 영화의 역사에 이름을 새긴 〈에일리언〉, 〈블레이드 러너〉, 〈델마와 루이스〉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다소 대중 친화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상기 매체들의 과장이 섞였다는 추측을 감안하더라도 쉽사리 넘길 평가는 아니다.


극장판과 감독판에 대한 상이한 평가는 관람의 시공간이 대중영화에게 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탐구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고증은 그대로이며, 새로운 CG가 들어가지도 않았고, 복원을 통한 색보정이 들어가 있지도 않다. 본인이 촬영을 마치고 개봉 전 편집을 해낸 장면들을 재삽입해 원래의 구상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동일한 작품에 대한 평가가 뒤집어졌다. 이러한 결과는 어쩌면 관객이 극장판을 관람하며 느꼈던 인물에 대한 고증의 위기감, 디제시스의 사실성에 대한 천착에는 더욱 깊은 층위의 동기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관측을 가능하게 한다.


〈킹덤 오브 헤븐〉, 전부, 아니면 전무

〈킹덤 오브 헤븐〉(2005) [출처: Movie-Screencaps]


1184년, 프랑스의 한 마을에 살고 있는 대장장이 발리앙(올랜도 블룸)은 유산을 겪고 자살을 한 부인의 죽음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이부형제인 성직자(마이클 쉰)는 부모가 남긴 모든 유산을 상속받고 싶은 마음에 발리앙을 사사건건 괴롭힌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영주의 아들 고드프리(리암 니슨)는 발리앙을 방문해 자신이 그의 친부라는 사실을 밝히고 그의 모친과 결혼을 하지 않고 성장기 동안 사라져 있었던 사실을 사과한 후, 자신을 이스라엘 왕국으로 따라와 영지를 상속받기를 권유한다. 하지만 발리앙은 생전 처음 보는 부친을 따라 죽은 부인이 묻혀있는 고향을 떠나기를 주저하고, 고드프리는 자신의 여정길을 알려주고 마을을 떠난다. 그날 밤, 발리앙을 방문한 이부형제는 떠나지 않은 발리앙에게 자신의 명령으로 자살로 죽은 부인을 묻기 전, 지옥으로 떨어진 시체의 목을 베었다고 말하며 그를 조롱하고, 분노한 발리앙은 그를 살해하고 고드프리를 따라나선다.


이 영화에서 그려내는 서사의 계기가 중세인을 지배하고 있는 유신론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주목해보자. 발리앙의 부인은 자살했으며, 기독교리상 자살한 인간의 영혼은 지옥으로 보내진다. 때문에 성직자는 형제의 부인임에도 거리낌 없이 그녀의 시체에서 목걸이를 갈취하고, 그녀의 목을 베어 사람들이 다니는 네거리의 한 복판에 매장한다. 그의 종교, 더욱 자세히는 경험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내세의 결과가 그가 현세에서 저지르는 반인륜적인 악행을 가능케 한다. 한편, 발리앙이 마을을 떠나게 되는 계기는 인륜의 연유인 부친과의 재결합보다는, 성지 예루살렘을 찾아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에 대한 고해, 자살을 함으로 지옥에 떨어진 부인의 속죄를 찾기 위한 신앙의 구원이다.


고드프리의 일행과 합류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배를 타기 위해 이탈리아의 메시나로 이동하던 발리앙은 그를 추격해온 영주의 아들, 즉 고드프리의 조카와 교전을 하고, 고드프리는 이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고드프리 일행 또한 동료인 구호기사(데이빗 듈리스)와 영국인 하사(케빈 맥키드)만 살아남는다. 일행은 메시나에 도착했지만 결국 상처가 악화된 고드프리는 임종 직전 아들 발리앙을 불러 그의 후계자이자, 기사로 서임한다. 고드프리는 발리앙에게 예루살렘의 국왕 보두앵 2세를 수호하라 유언을 남기고, 그에게 기사의 맹세를 전달한다.


네 적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말아라. 용기를 가지고 바르게 살아 신에게 사랑받으라.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라, 심지어 진실이 너를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약자를 지키고, 악행을 짓지 말아라. 이게 네 서약이다.


서임을 위한 맹세를 전달한 고드프리는 그의 아들의 뺨을 친 후, "이 고통과 함께 기억하라"라고 전달한 후, 임종 직전 자신의 고해성사를 위해 성직자와 대면한다. 죽기 전 모든 죄를 뉘우치는지 묻는 신부에게 고드프리는 발리앙을 바라보며 "단 하나의 죄만을 제외하고 모두"라고 답한 후, 세상을 떠난다. 결혼을 하지 않고 서출 발리앙을 세상에 내보내고, 다시 그와 만나 잠시간의 부자관계를 즐겼던 "단 하나의 (교리에 기반한) 죄"는 그에게 있어 내세보다 더욱 중요한 인륜의 도리였다. 아들에게 "악행을 짓지 말아라"라고 부탁한 직후 그가 이 "하나의 죄"에 대해 속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종교의 "죄"와 인륜의 "악행"을 구분하고 있다는 신념을 명확하게 전달한다. 이 구분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 발리앙의 행적을 지배하게 된다.


기사 서임식, 발리앙(올랜도 블룸), 고드프리(리암 니슨), 〈킹덤 오브 헤븐〉 [출처: Movie-Screencaps]


그렇지만 잠깐 기사의 서약으로 돌아가 보자. 『기사도(La Chevalerie)』(1891)를 저술한 레옹 고티에는 작품 내에서 도덕적 의무를 포함한 기사 서약은 실제 역사에서는 십자군 전쟁 이후인 중세 말기에 성문화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가 제시한 기사도 10계명의 전형은 다음과 같다.


교회의 가르침을 전부 믿고, 그 지시를 모두 따르라.  

교회를 수호하라.  

약자를 존중하며, 그들의 수호자가 되어라.  

태어난 국가를 사랑하라.  

적의 앞에서 물러서지 말아라.  

불신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휴전하지 말고 자비를 보이지 말아라.  

신의 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봉건 제도의 의무를 다하라.  

거짓을 말하지 말고, 맹세에 신의를 지켜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두에게 나누어라.  

모든 곳에서, 언제나 올바름과 선함의 투사가 되어 불의 및 악행과 싸워라.  


고티에와 고드프리 기사 서약을 대충 훑어만 보아도 제1과 2계명의 교회, 4계명의 국가에 대한 충성 (특정 왕에 대한 충성으로 교체되었다), 6계명의 불신자에 대한 폭력의 허용, 7계명의 봉건 제도에 대한 의무의 삭제가 쉽사리 눈에 띈다. 교회, 국가, 종교, 봉건제의 공통점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관으로, 제도의 관습을 따라 계급을 나누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킹덤 오브 헤븐〉의 조형 시공간에는 이러한 관습이 존재하지 않느냐고 물어본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발리앙의 이상과 선의는 예루살렘 왕국의 차기 국왕 기 드 뤼지냥(마튼 초카스), 교회와 봉건주의의 끔찍한 혼종인 성당기사단장 르노 드 샤티용(브렌던 글리슨)으로 대표되는 국가, 종교, 교회의 관습에 기반해 끊임없이 도전받고 전복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 세계의 고드프리는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훨씬 미래에 성문화 되겠지만) 기사 서약에서 제도의 사슬을 일부러 파괴한 채로 아들에게 물려주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여기까지의 결론은 영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에 그다지 새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어떤 이들은 〈브레이브 하트〉의 멜 깁슨이 외치는 (할리우드의) 자유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서약에 공통적으로 포함되는 "거짓을 말하지 말라"라는 계명의 미묘한 차이를 살펴보자. 고티에의 10계명에서 가장 선행되는 지시는 "전부", "모두", 다시 말해 '무조건'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명령이다. 그에 비해, 고드프리의 서약에서 '무조건' 따라야 하는 지시는 "진실을 말하라"는 계약뿐이다. 고드프리는 "심지어 진실이 너를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진실을 말하라"라고 명령한다. 쉽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도의 사슬에서 풀려난 개인에게 어떠한 가치가 진실로 기능할지는 무척이나 난감한 주제다.


이 난제는 칸트 윤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실천이성비판』(1788)의 대주제로 이어진다. 칸트는 경험, 관습, 제도가 지시하는 목적 달성을 위한 행위, 가언명령에서 벗어나 단 하나의 윤리 의무, 그 행위가 자신의 사유에서 비롯된 기준이 가리키는 정언명령을 따르라고 주문한다. 다시 말하면, '내세'의 행복을 위해, '사회가 지정하는' 선행이 아니라, 외부 영향에 관계없이 자아가 옳다는 결론에 도착한 지고선을 추구하라는 의지에 관한 논의다. 이를 다시 고드프리의 계명과 연결해 본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결론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죽음이나 다름없다는 도덕률(Moral Absolutism)로 이어진다. 물론 칸트의 정언명령과 도덕률을 실제 개인의 인생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지속적인 대화를 통한 합의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이는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 정답이 존재한다는 가정이라기보다는, 답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의구심에 가깝다. 때문에 〈킹덤 오브 헤븐〉의 서사는 장성한 이후 평생 없다고 생각했던 부친을 만났다가, 며칠 후 잃게 된 발리앙이 부친이 전달한 아리송한 계시를 체화하는 과정이라 요약해도 큰 무리가 없다.


메시나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지만 폭풍우에 난파당한 발리앙은 한 해변에서 깨어나고, 배에 실려있던 말을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그 광경을 보고 말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슬람 전사와 결투를 해 승리한다. 결투를 말리려던 그의 종자(알렉산더 시디그)는 발리앙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체념한 모습을 보이지만, 발리앙은 그를 길잡이 삼아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성지에 도착한 발리앙은 감사의 표시로 길잡이에게 말을 선물하면서 포로 신분에서 해방하고, 길잡이는 발리앙의 이름이 명예로운 전사로 이슬람 군대에게 알려지게 되리라고 응답하며 떠난다. 발리앙은 기사가 되자마자, 자신을 공격해오는 적의 앞에서 두려움 없이 결투에 임하고, 무기가 없는 포로 신분의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면서 고드프리의 유언을 실행하고 있다. 발리앙에게 그 대상이 본인이 속한 제도에서 불신자라고 여겨지는 이슬람이라는 사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발리앙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언덕에서 밤을 지새우며 신의 계시, 징후를 기다리던 발리앙은 침묵의 끝에 아내의 십자가 목걸이를 언덕에 묻으며 질문한다.


당신이 어떻게 지옥에 있을 수 있나요? 이렇게 내 마음속에 있는데.


골고타 언덕, 발리앙(올랜도 블룸), 〈킹덤 오브 헤븐〉 [출처: Movie-Screencaps]


기독교리에서 내세의 장소인 천국과 지옥은 목적이며, 삶은 영생의 위치를 결정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발리앙은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부인과의 관계가 교리에서 지정한 운명보다 선행된다 이야기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부인, 이슬람 전사,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떠났던 친부 고드프리와의 맺은 인간의 교류와 관계가 삶의 목적으로, 그들의 신앙과 교리상의 죄는 이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도 못한다. 이는 칸트가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논한 '인륜의 왕국(Kingdom of Ends)'이 형성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로, 칸트는 모든 인간이 서로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Ends)으로 대하는 세계를 이상향으로 추구했다. 하지만 '인륜의 왕국'은 말 그대로 이상의 땅이며, 발리앙은 14세기의 중동, 그중에서도 정치와 종교의 도리가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는 현실의 예루살렘에 막 도착했다.


부친의 가신들과 만난 발리앙은 곧 예루살렘의 정치판에 끌려들어 가게 된다. 예루살렘 왕국의 현명한 지도자 보두앵 4세(에드워드 노튼)는 그의 치세 중에는 살라흐 앗 딘을 상대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위태로운 평화를 슬기롭게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병으로 인해 쇠약해진 육체로 인해 그의 누이인 시빌라(에바 그린)와 정략결혼을 한 매부 기 드 뤼지냥과 그를 따르는 성당기사단장 르노 드 샤티용을 따르는 주전파가 이슬람을 상대로 저지르는 만행을 간신히 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왕이 원하는 평화를 따르는 이는 티베리아스 백작(제레미 아이언스)으로, 발리앙을 환대하는 티베리아스의 태도로 보아 고드프리 또한 평화파의 일원이었다고 추측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단순히 거만하거나, 폭력적인 악역으로 보일 수 있는 뤼지냥과 샤티용이 성전을 쫓는 동기에 대한 질문이다. 이들은 고드프리가 기사 서약에서 삭제했던 제1과 2계명의 교회에 대한 충성, 6계명의 불신자에 대한 폭력의 허용을 가장 숭상하며, 살라흐 앗 딘과 이슬람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신의 영광을 받기를 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동기 또한 기사도가 지시하는 행동 범주 안에 속해있으며, 심지어 고티에의 저서에 따르자면, 발리앙의 동기가 되는 정언명령에 가까운 관용과 선행보다 당시의 사회제도에서 우선시 되는 절대 계명이다.


발리앙은 보두앵 4세와 인상적인 만남을 마치고, 부친 고드프리가 물려준 영지인 이벨린으로 향한다. 그의 부관 아말릭(벨리보르 토픽)의 묘사에 따르자면 "가난하고 먼지투성이인 장소"다. 그의 부친 고드프리가 쓰던 방의 벽에는 '죽음의 무도'가 그려져 있고, "Quod Sumus Hoc Eritis"라는 라틴어 경구가 그를 환영한다. 발리앙은 "우리의 모습처럼, 너희도 곧 이렇게 되리라"라는 섬뜩한 의미를 곱씹어본다. 고드프리는 왜 이런 불길한 그림을 침실에 두었을까. 영화는 직접적인 답변보다는, 그 뒤에 따라오는 발리앙의 행동으로 관객에게 '죽음의 무도'가 장식된 침실, 죽음이 곧 다가올 수도 있다는 의미에 대해 직접 생각해보기를 주문한다.


'죽음의 무도', 〈킹덤 오브 헤븐〉 [출처: Movie-Screencaps]


발리앙은 이벨린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지하수를 퍼올리고, 개간을 통해 땅이 비옥해진다. 대사가 없이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본 영화에서 독보적으로 희망적이고 건설적인 분위기에 젖어있다. 발리앙과 아말릭은 팔을 걷고 나서 이슬람교도, 유대인, 기독교인들로 이루어진 영지의 소작인들과 함께 땅을 일궈나간다. 발리앙의 행동에 "가난하고 먼지투성이인 장소"를 개선하고 싶다는 열망 외의 다른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발리앙을 인상 깊게 바라보았던 시빌라가 이벨린을 방문하고, 발리앙이 땅을 개척하는 모습을 본 후, "이곳에 평생 머물고 싶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물론 너무 잘생긴 배우의 외모 때문에 가려질 수도 있지만) 발리앙의 외모, 그의 배경 때문이 아니다. 발리앙이 이벨린에 구축한 세계가 바로 "인륜의 왕국"의 편린으로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담고 있으며, 그가 이상향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에 잠재울 수 없는 삶의 활기가 과잉되어 흘러나오고 있다.


이벨린의 소생, 〈킹덤 오브 헤븐〉 [출처: Movie-Screencaps]


'죽음의 무도'로 돌아가 보자. 죽음 앞에서는 종교도, 사회적 지위도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허망하다. 우리는 그 해골이 살아있던 시절 왕이었는지, 기사였는지, 이교도였는지, 노예였는지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발리앙이 아내와 부친의 죽음 이후 도달한 침소에서 아버지 고드프리의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다. 프랑스 귀족 가문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마 유럽보다 훨씬 위험한 땅인 중동의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해 성지의 영주라는 위치까지 도약했지만, 이슬람교도와의 성전이 아니라 고향에서 자신의 조카에게 입은 상처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아들을 찾아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함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의 무도'는 발리앙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초연한 태도를 보였던 부친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고, 목적을 위한 선행이 아니라, 선행을 위한 삶을 목적함이 죽음 앞에 당당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보두앵 4세가 쇠약한 틈을 타, 뤼지냥과 샤티용이 이슬람 상단을 공격하자 살라흐 앗 딘(가산 마수드)은 군대를 이끌고 성전기사단의 보루인 케락으로 향한다. 발리앙은 케락의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성 안으로 피신하지 않고 소수의 수하들과 함께 돌격하고 살라흐 앗 딘의 포로로 잡히지만, 그 순간 보두앵이 살라흐 앗 딘을 맞이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군대와 함께 도착한다. 보두앵이 살라흐 앗 딘에게 샤티용을 벌하겠다 약속하면서 다시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된다. 하지만 보두앵은 이 종군으로 인한 육체적 부담으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자 발리앙에게 제안을 한다. 자신이 기 드 뤼지냥을 사형한다면, 과부가 된 자신의 누이인 시빌라와 결혼을 해 국왕이 되어 예루살렘의 평화를 지켜줄 수 있는지 질문한다. 발리앙은 시빌라를 사랑함에도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발리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티베리아스는 "예루살렘은 완벽한 기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비난하지만, 발리앙은 예루살렘의 가치를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인륜의 왕국이거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발리앙이 결정을 내린 이후 그를 찾아온 시빌라는 그에게 "곧 더욱 큰 선행을 위해 작은 악행을 했기를 바라며 후회하는 날이 온다"라고 말한다. 사실 마키아벨리 논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시빌라와 티베리아스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기 드 뤼지냥은 그 악행으로 인해 사형당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보두앵이 그를 사형한다면 자신을 지켜줄 군사적 세력이 없는 시빌라는 곧바로 위험에 처하고, 예루살렘 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시빌라와 발리앙은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발리앙은 유능하고 정의로운 군인이자 지도자다. 그렇다면 보두앵이 뤼지냥을 사형하고 발리앙과 시빌라가 결혼한다면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된다. 하지만, 발리앙의, 혹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르자면, 만약 발리앙이 예루살렘을 수호하기 위해 시빌라와 결혼하고, 시빌라와 결혼하기 위해 뤼지냥을 사형한다면, 뤼지냥과 시빌라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한다. 발리앙에게 있어 예루살렘의 수호는 그 행동 자체가 수단이자 목적이 되어야 한다. 발리앙의 예루살렘은 유대-기독교의 원천, 혹은 예수가 죽은 성지가 아니라, 칸트가 논하는 "인륜의 왕국(Kingdom of Ends)"에 가깝다. 적어도 〈킹덤 오브 헤븐〉 배경의 시공간에서 보두앵이 지키려 했던 예루살렘은 모든 인간이 종교라는 제도에 관계없이 서로를 인간으로 대하는 장소로 묘사되며, 이는 "인륜의 왕국"으로 향하는 첫 번째 발자국이다.


보두앵의 죽음 후, 왕위에 오른 기 드 뤼지냥은 성전을 선포하고 르노 드 샤티용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이슬람 지역으로 이동하지만 살라흐 앗 딘의 요격으로 대패한다. 살라흐 앗 딘의 누이를 욕보였던 샤티용은 그 자리에서 참수를 당하고, 뤼지냥은 포로라는 치욕적인 운명에 처해진다. 한편, 자신의 아들이 동생과 같은 나병의 징조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빌라는 아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도록 잠든 사이에 독살을 하고, 예루살렘의 수호를 포기해버린다. 티베리아스마저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떠나면서, 성지의 수호라는 막중한 책임이 발리앙에게 넘어온다. 그가 3일간 살라흐 앗 딘의 군대에 맞서 예루살렘을 지켜내자, 살라흐 앗 딘은 협상을 요청해온다. 발리앙은 살라흐 앗 딘에게 예루살렘을 넘겨주느니, 예루살렘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겠다고 답한다. 살라흐 앗 딘은 차라리 그러는 게 모두를 위해 나을지도 모르겠다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는, 발리앙에게 성지 내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안전하게 고국으로 돌아가게 보호해준다고 약속하면서 전쟁이 끝나게 된다. 발리앙은 문득 생각난 듯이 이슬람의 지도자에게 "예루살렘의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살라흐 앗 딘이 "아무것도 아니다 (Nothing)"라고 대답하자, 발리앙은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본진으로 돌아가던 살라흐 앗 딘은 다시 돌아서서 "모든 것이다 (Everything)"라고 대답한다. 전부(Everything)이거나, 전무(Nothing)하거나.


살라흐 앗 딘(가산 마수드), 〈킹덤 오브 헤븐〉 [출처: Movie-Screencaps]


〈킹덤 오브 헤븐〉의 표면에는 영화가 제작되었던 조형의 시공간에 벌어지고 있었던 9.11 테러, 이후 중동을 덮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의 동기인 종교 간 반복에 대한 비판이 자리 잡고 있다. 천년이 지난 후에도 성스러운 왕국(예루살렘)의 평화는 요원해 보인다는 자막과 함께 영화가 끝을 맺는 만큼, 본 작품이 배경의 시공간만큼이나 조형의 시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임은 무척 당연해 보인다. 다만, 발리앙이 이벨린과 예루살렘에 아주 잠시나마 구축했던 종교 간의 공존이 가능한 이상향만을 가지고, 스콧 감독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실제로 극장판을 관람한 관객들은 영화의 논지가 환원주의적이며 발리앙이 그 논지의 전개를 위해 너무나도 현대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행동한다 느꼈을 수도 있다.


〈킹덤 오브 헤븐〉의 극장판과 감독판의 가장 큰 차이는 발리앙과 시빌라의 관계에 대한 서브플롯의 강화로, 영화 중반, 시빌라가 이벨린에 머무르던 중에 인상적인 장면이 존재한다. 이벨린에 수로를 만든 발리앙은 마을의 아이들이 만든 작은 장난감 배가 수로를 떠내려가는 광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면서 "가난하고 먼지투성이였던" 농지가 비옥해지는 장면이 디졸브 전환으로 보인다. 재생하는 땅을 바라보며 뿌듯해하는 발리앙, 그리고 땅의 변화와 발리앙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빌라의 표정이 이어진다. 영화가 더욱 길어지더라도, 발리앙이 이벨린을 개척하는 쉬어가는 액트가 더욱 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존재한다. 동기와 타협이 제거된 순수한 노력과 행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킹덤 오브 헤븐〉의 극장판에서 관객이 느꼈던 위화감은, 중세 예루살렘 왕국에 현대인이 활동하고 있다는 고증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타협이 없는 "인륜의 왕국"을 원하던 발리앙과 배경의 시공간을 연출해낸 스콧 감독이 개봉 직전 조형의 시공간에서 '흥행'을 위해 작품을 타협함으로, 영화 내-외부의 메시지가 뒤틀렸고, 뒤늦게 감독판을 공개함으로 그 부정교합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전부 이야기하지 않음은 아예 하지 않음보다 못하다.


마침

언뜻 보면 전혀 같은 지면에서 논할 가치가 없다고 느낄 수 있는 〈제7의 봉인〉과 〈킹덤 오브 헤븐〉을 굳이 엮어서 이야기해보려 마음을 먹은 이유는 그들이 비슷한 종류의 비난을 듣고 있지 않나 하는 (희박한 근거의) 심증 때문이다. 굳이 상상을 섞어 부언해 보자면 연출의 형태는 판이하게 다를지라도, 작가가 작품을 조형하면서 비추는 구도자의 태도가 편협하거나 도취적이라는 반응이다. 만약 작품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거나, 거장이라 불리는 문학 작품의 각색일 경우에는 비판의 목적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이 '작품'이 아닌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은 이들이 역사를 비틀어 조형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논지를 과잉시켜 흘려보내고 있다고 느낀다. 지금의 이야기를 하려 배경이 되는 역사를 수정(revise)하기에 이러한 작품들은 '수정주의(revisionism)'라고 불려지며, 작가의 의도와 철학적 고찰의 깊이, 나아가서는 작가의 개인적 자아 성찰을 위한 고증 무시가 오늘의 사회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과 논의 자체가 유의미하기에, 계속 작가들이 역사 영화를 만들어야 하고, 계속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그 불편함의 이유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대답한다면 양시론으로 수렴할까.


두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죽음의 무도'가 등장한다. '죽음의 무도'는 중세의 유럽과 중동이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상에서, 가장 '현대'적인 행동양식을 보이는 욘스와 발리앙의 시선을 통해 화면에 담긴다. 배경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욘스와 발리앙이, 실제 역사를 살아간 (적어도 자신들의 사상 체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들과는 달리 독보적으로 반-종교적이고, 탈-시대적인 행동양식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이들은 디제시스 내부에서 암약하는 작가 베리만(안토니우스와 욘스가 작가 내부의 갈등을 나뉘어 담당하고 있지만)과 스콧의 아바타로 기능한다 보아도 무리가 없다. 욘스는 '죽음의 무도'를 마주하고, 마지막 순간 사신을 만난 이후에도 괴로워하는 안토니우스에게 "눈알을 굴리고, 발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위대한 승리감을 즐기라"라고 다그친다. 발리앙(스콧 감독)은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작은 영지 이벨린이 곧 이슬람교도의 손에 넘어가고, 성지를 죽음으로 뒤덮는 미래를 보았지만, 그전까지 이벨린을 소생시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두 영화에서는 '지금'이 아닌 시간, 인류의 과거, 영화가 성립되기 위해 유난히 그 시간과 공간이어야만 했던, '중세' 세계가 이미지 내부를 지탱한다. '죽음의 무도'가 고약한 농담, 혹은 엄숙한 경고가 아니라 세계를 가득 채우는 만연한 일상이라면, 삶의 가치에 대한 다소 진부해 보이는 논의가 추상화된 형이상학의 층위에서 떨어져나와,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제시하는 실체의 격언으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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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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