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살
2009년 봄부터 2011년 겨울이 끝날 때까지 군대에 있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병영 분위기에서 생활했던 나는 개인정비(일과 외 자유시간)시간을 선임들의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자유롭다는 것은 생활관에 대자로 늘어져있는 그런 자유가 아니라 도서관에 가거나 노래방에 가거나 인터넷을 이용하거나 전화를 하는 그런 활동들을 혼자서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이상하게도 군대는 일병이 될 때까지 개인행동을 금지하는 문화가 있다) 어쨌든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고 주로 책을 읽거나, 선임들과 운동을 하며 보냈다.
내가 기타를 잡게 된 계기는 개인적으로 좀 슬프다. 으레 군대 고무신이 그렇듯 당시 나와 사귀던 친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고 나중에 알게 된 나는 아주 크게 상심했다.(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하지만 그 당시에는 좀 심각했다) 이별을 제대로 당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뭘 해도 정신이 팔린 듯 집중할 수가 없다. 운동을 해도 멍 때리고 있고 책을 읽어도 글자가 도저히 들어오지 않아 참 힘들었다. 사람들의 뻔한 위로도 이젠 피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혼자 있을 공간을 찾게 되었고, 와중에 아주 좋은 공간을 찾았다. 바로 옥상에 있는 강당 뒤에 있는 전산(?) 실이었다. 음향이나 전반적인 무대 장치를 관리하는 곳이었는데, 약간 다락방 느낌으로 아늑했고 무엇보다 그곳에선 커다란 창으로 서울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강당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지치면 난 그 다락방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바삐 움직이는 서울의 불빛들을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를 아꼈던 한 선임이 제대하면서 쓰던 기타를 주고 갔다. 그냥 주고 갈 정도로 그 기타는 별 볼 일 없고 값싼 모델이었지만, 나는 그걸 다락방에서 건드려보기 시작했다.
기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거니와 나는 어거스트 러시가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할 줄 아는 게 없었지만, 그 당시 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기에 마치 시험기간에 재밌어하는 대청소처럼 기타에 빨려 들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코드표를 찾아서 그나마 쉬운 곡들을 연습했다.
놀랍게도 재미있었다. 평생 악기라고는 피아노만 경험해본 나로서는 피아노가 갖고 있지 못한 현악기의 남성스러움에 반했다. 손가락이 아펐지만 기타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 왼손의 굳은살을 만들었다.
손에 굳은살이 제법 단단해질 무렵, 나는 기타 초심자 마의 관문이라는 F와 Bm를 어느 정도 떼었고, 그러고 나니 웬만한 곡은 느릿느릿 반주를 할 수 있었다. 듣기만 하던 가요들의 코드들이 내 손으로 나오니 신기하고 재밌었다.
내가 기타를 지금까지 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존재는 내 가장 친한 동기다.
제대하고 난 복학해 학교 기숙사에 살았는데, 내 룸메는 기숙사 바로 앞에 자취하는 여자친구가 있어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방에서 잤고, 이는 나에겐 엄청난 혜택이었다. 2인실은 혼자 쓰니 좋은 점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는 마음껏 기타를 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 감사한 룸메 덕분에 내 개인 연습실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고, 더불어 나와 1학년 때부터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해온 동기도 혼자 캐나다에서 독학으로 기타를 익힌 친구라 마음이 잘 맞아 종종 내 방에서 맥주 한잔 하며 기타를 치며 세상을 노래했다. 물론 실력이야 한없이 부족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즐겁게 기타를 쳤던 때였던 것 같다. 군대에서 혼자 기타를 치며 느낀 재미와는 또 다른, 함께 합을 맞추며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후에 그 친구는 젬베로 전향했고, 우리는 공강 시간에 종종 학교 잔디에서 캠퍼스의 칙칙함을 기타로 밀어냈다. 물론 지금은 결혼해서 기타를 놓다시피 해서 안타깝지만, 도리가 없다.
기타는 내 안의 어떤 갈증을 더 타오르게 한다. 존 메이어의 LA 라이브를 비롯한 기타리스트들의 그 자유로우면서 멋들어진 연주를 보고 또 듣고 있으면 뭔가가 벅차오른다. 그리곤 나도 달려가 기타를 잡고 쳐본다. 실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존 메이어가 몇 년간 방에서 히키코모리같이 살며 기타에 미친 뒤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는 뮤지션이 되었던 것처럼, 왠지 나도 곧잘 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일단 잡고 따라 해 본다. 물론 어떻게 치는지 모르는 곡이 태반이고 또 혼자 유투브를 따라서 하나하나 익혀가야 하기 때문에 배우는 시간도 적지 않게 들지만 그래도 난 그 과정 자체가 즐겁다. 수많은 연습 끝에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똑같이 따라 커버를 칠 수 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이기에, 그렇기에 나는 아마도 내 손에 힘이 약해져 더 이상 코드를 잡기 버거울 때까지 기타를 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전처럼 미쳐있진 않고 이따금씩 손이 심심할 때.
한 가지 더. 오늘 아침 출근길에 장범준 2집의 프롤로그 비슷한 느낌의 기타곡들을 들었는데 제법 기대가 되었다. 빨리 나오길. 뭐 벚꽃좀비라서 아마 봄쯤에야 나오겠지만, 그래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