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솔직하고 포근한 나의 보이차
시골에서 고구마를 한아름 보내주셨어요. 한번에 씻어 삶으려고 큰 볼에 담아 물을 부었는데, 어쩐지 익숙한 향이 훅 올라왔습니다. 아, 물론 고구마에 묻어 있는 흙내겠죠. 근데 그 익숙함이 조금 달라요. 고구마에 흙을 닦으며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 보이차 냄새다! 익숙한 냄새의 정체가 보이숙차 향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혼자 깔깔거렸어요. 아, 진짜 흙냄새잖아?
앞선 글에도 언급을 했지만 본격적으로 차를 '취미'로 삼게 된 계기는 '보이차 클래스'입니다. 보이차는 보이생차와 보이숙차로 나뉘는데 그중에서도 저는 '보이숙차'를 좋아해요. 보이차면 보이차지 왜 나뉘냐 궁금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부족한 지식이나마 간략하게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보이차는 6대 다류(백차, 녹차, 황차, 청차/우롱차, 홍차, 흑차) 중 흑차에 속해요. 흑차는 차나무 잎을 딴 후 녹차처럼 살청하여 발효를 멈춘 뒤에 미생물을 이용해 후발효를 시킨 차 자체를 뜻합니다. 보이차는 이러한 흑차의 제다 방식을 따르나, 중국 운남성에서 만든 경우 '보이차'라고 해요. 보이생차와 숙차는 발효 방식에 따라 구분되는데요. 보이생차의 경우 자연에서 그대로 미생물 발효가 일어나도록 수년에서 수십 년간 천천히 발효시킵니다. 반대로 보이숙차는 발효가 빠르게 일어날 수 있는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어 생차처럼 기다리지 않고도 바로 마실 수 있게 만들어요.
두 차는 수색이나 향, 맛 모두 달라요. 보이생차는 어떻게 보면 녹차랑도 비슷하게 산뜻하고 맑은 청향이 나며, 약간의 쓴맛과 떫은맛이 나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 숙성될수록 쓴 맛이 줄고 단맛과 진향이 올라와요. 수색은 투명하고 맑은 노란빛을 띠다가 오래 숙성된 생차의 경우 색이 점점 짙어집니다. 이에 반해 보이숙차는 진한 검붉은 색을 띤 수색에 부드럽고 묵직한 맛이 특징입니다. 떫은맛이나 쓴맛이 적어 생차보다 마시기 편안해요.
수색도 맛도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는 보이숙차의 '독특함'은 향에 있습니다. 차 애호가라면 깊은 나무향, 흙의 따뜻한 향, 잘 익은 대추의 은은한 단향 등으로 표현하겠지만 처음 보이숙차를 접한 경우, 흙냄새, 지하실 냄새, 젖은 낙엽 냄새, 곰팡이 냄새, 습한 창고 냄새 등 썩 긍정적이지 않은 표현을 쏟아내죠. 보이숙차는 차 중에서도 호불호가 강한 편에 속합니다.
저에게도 보이숙차는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여태 홍차, 그것도 과일향, 꽃향이 넘실거리는 가향 홍차만 마시던 제게 처음 보이차 클래스에서 맡은 보이숙차의 향은 꽤 충격이었어요. 이것도 같은 찻잎으로 만든 차라고? 의심까지 했어요. 그렇지만 그 향이 결코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그날 낮은 조명에 따뜻한 온기 가득한 공간에서 만난 보이숙차의 향은 이상하게 포근하고 따뜻했어요.
그리고 문득 짧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제가 참석한 보이차 클래스는 저의 예전 상사이자 현재는 다예사(차전문가)이신 선생님이 진행하셨는데, 그분과 함께 일하던 시절의 기억이었어요. 끊임없는 업무와 야근에 지친 나에게 괜찮냐며 건네 주신 차 한잔. 그 차가 보이차였어요.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라, 차의 맛이나 향은 기억나지 않지만 함께 받은 따뜻함은 나의 몸과 마음을 보듬기에 충분했습니다.
첫 기억, 경험이 많은 것을 좌우하는구나. 누군가에게 (향이) 이상한 차라고 생각될지 몰라도, 나에게 흙내음, 젖은 낙엽 냄새는 포근함과 따스함이구나.
이후 각양각색의 매력 있는 차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이전보다 보이숙차를 찾는 경우는 현저히 줄었지만 차모임이나 티코스에서 우연히 보이숙차를 만나게 되면 괜스레 마음이 노곤노곤 녹아요. 고향에 큰 애착은 없지만 흔히 말하는 고향에 온 기분이랄까.
향이 좋은 차라는 기준에 보이숙차는 불합격일 수 있어요. 쿰쿰한 흙냄새, 사우나 냄새, 젖은 낙엽 냄새는 누군가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향이니까요. 하지만 알아요. 화려한 꽃향이나 맑은 청향이 나에게 줄 수 없는 묵직한 포근함을 보이숙차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걸. 보이숙차는, 세상의 기준과는 달라도 저에게 가장 깊은 위로를 건네는 포근한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