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지만 오롯한 나의 의식
업종 특성상 평일에 쉬는 경우가 많아서 일주일에 두어 번 낮 시간 동안은 오롯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냅니다. 보통은 집에 콕 박혀서요. 소문자 e 성향을 가진 저는 사람 만나는 건 좋아하지만, 외출은 극도로 꺼리는 편입니다. 이런 제게 무려 쉬는날 외출이라니? 썩 달갑지 않죠. 분명 일할 때는 다음 휴무에는 꼭 새로운 찻집이라도 찾아가야지! 하다가도 씻고, 머리를 말리고, 얼굴에 크림이라도 바르고, 옷까지 챙겨 입는 이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미루게 돼요.
아니, 솔직히! 타인이 나를 보고 불쾌해하지 않도록, 사회적 기준에 맞추어 나를 포장해야 하는 행위! 이거야 말로 1차원적인 사회적 노동이 아닐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해봅니다. 사실, 그냥 씻기 귀찮은 사람의 궤변이지만요.
이렇게 보면 세상만사 귀찮아하는 타입 같지만, 의외로 저는 부지런해요. 휴일에도 평소와 비슷한 시각에 기상을 하고,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은 청소와 빨래, 그리고 식사 준비입니다. 쉬는 날에도 저의 노동은 계속 이어지지만 힘들거나 귀찮지 않아요.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노동은 나 스스로를 챙겨주고, 다독여주는 느낌이니까요.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제가 가장 기대하는 노동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이 노동은 어떤 차를 마실지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돼요. 네 개의 서랍장을 하나씩 열어 그 공간을 가득 채운 차봉투를 뒤적이며 오늘 마실 차를 고릅니다. 세상의 온갖 복잡한 선택지는 잠시 두고 나를 위한, 나의 취향에 맞는 찻잎을 고르는 이 시간만큼 신중해지는 시간은 없어요. 부쩍 날씨가 쌀쌀해지니 하동 잭살차가 알맞겠네요. 얼마 전 차박람회에서 구매한 잭살차를 구석에서 꺼냅니다.
차를 꺼내고 나면 두 번째 선택의 시간입니다. 오늘 나의 잭살차를 맛있게 우려 줄 다구를 선택해야 하죠. 잭살차에는 홍차잎과 생강, 돌배, 유자 조각 등이 들어 있으니 그대로 볼 수 있는 투명한 유리 다구도 괜찮을 것 같고요, 이번 여름 여행 가서 데리고 온 노란색 개완에도 눈길이 갑니다. 찻잎 정리가 조금 귀찮지만 기분도 낼 겸 다관을 꺼내보는 건 어떨까 고민도 해봐요. 다구를 고르면서 어울리는 티매트도 꺼내야 합니다. 다구가 테이블에 닿아 상하지 않도록, 테이블에 찻물이 떨어져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필요해요.
선택이 끝나면 이제 본격적인 찻자리 노동이 시작됩니다. 커피포트에 물을 넣고 팔팔 끓여요. 오늘의 차는 잭살이라 100도까지 끊여도 괜찮습니다. 물 온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물이 끓으면 일단 개완(노란색 개완을 골랐어요)에 물을 가득 부어요. 1분 정도 가만히 기다리다 개완에 담긴 물을 숙우에 비워요. 숙우에 담긴 물의 일부는 찻잔에 붓습니다. 그렇게 다구가 데워질 때까지 기다리며, 저울에 다하를 올려 찻잎을 계량합니다. 보통은 3g이지만 생강, 돌배 등이 블렌딩 된 잭살은 5g으로 계량했어요.
다구를 데운 물을 퇴수기에 붓고 개완에 찻잎을 가득 채웁니다. 유자의 상큼한 향이 피어올라요. 끓여둔 물을 개완 가득 붓고 30초 정도 기다린 후 숙우에 붓습니다. 따뜻한 김이 훅 올라오면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요. 잭살의 구수한 향과 생강, 모과, 유자의 상큼하고도 달큼한 향이 오묘하게 섞여 올라옵니다. 숙우에 담긴 찻물을 흐르지 않게 잔에 따르고,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셔봅니다. 온몸으로 따끈한 찻물이 퍼지는 기분.
세네 번 정도 차우림을 반복합니다. 멍하게 차만 마실 때도 있고,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거나, 숏폼을 끊임없이 볼 때도 있어요. 가끔은 책을 읽기도 하고, 요즘은 닌텐도 게임을 하면서 차를 마시기도 해요. 혼자서 즐기는 작은 호사입니다.
물론 아직 찻자리 노동은 끝나지 않았어요. 개완에 잠들어 있는 찻잎을 깨워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고(찻잎은 음식물이 아닌 일반쓰레기랍니다), 개완과 찻잔, 숙우 설거지도 해야 해요. 혹시나 찻물이 들 수도 있으니 테이블에 튄 찻물은 수시로 닦아내요. 젖은 티매트를 빨래 건조대에 널어놓으면 나의 찻자리도, 찻자리 노동도 끝이 나요.
찻자리 마저 노동으로 가득 채워요. 누군가에게는 귀찮음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쓸데없는 행위에 불과하겠지만, 저에게는 세상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으며 나를 위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며, 비어 있는 에너지를 꾹꾹 눌러 채워주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