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다

선택

by 애기타

두 갈래 길 이정표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다. 길의 방향을 확인하고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어쩌면 지금의 선택에 따라 다른 한쪽 길로 가볼 기회가 영영 없는 것처럼 고민을 거듭하며 망설이고 있다. 이정표 한쪽 길은 저자의 길이요, 다른 한쪽은 작가의 길이다. 어느 길이든 꽃길이 아님은 분명하다. 두 길 모두 울퉁불퉁하고 여기저기 뾰족한 돌부리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오리내리막이 심한 길이라 했다. 오가는 이도 드문 초행길이기에 선뜻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십여 년 전 수기 공모전에서 생각지도 않은 대상을 받은 게 지금의 고민에 이르게 하였다. 36년간 재직한 내 집 같았던 직장을 퇴직한 후 재취업하기까지 찬바람 부는 광야에 홀로 버려진 듯했던 그때의 심경을 적은 글이었다. 입선이라도 했으면 하는 소망과 달리 대상이라는 통보에 그게 정말이냐고 몇 번을 되물었다. 수상을 계기로 책을 한 번 써보라는 누님의 권유에 '내가 저자가 된다고….' 하는 설렘이 있었다. 내 글이 활자화되고 책으로 남는 일이니 멋진 일이다. 주변에 자신의 책을 가진 사람이 드물기에 더욱 그렇다. 근사하고 해 볼 만한 일이었으나 가슴이 뛰지 않았다. 간절함이 부족했기에 설렘만으로는 실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슬그머니 찾아온 60이란 나이, 화들짝 놀라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대부분의 우리 세대가 그러했듯 나 또한 주어진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살았으나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과 상실감이 엄습해 왔다. 천신만고의 노력으로 사회적 잉여 인간의 범주를 가까스로 벗어난 지금 지나온 삶의 행적을 기록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깊어갔다. “그래, 퇴직 전후의 10년,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고 또 처절했던 그 시절의 상황과 심경을 책으로 엮어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비록 사계절 아름다운 산야를 담아낸 산수화가 아니면 어떠랴, 먹을 풀어 흰 종이에 붓 하나로 담아낸 흑백의 수묵화도 그림이지 않은가.


신춘문예 공모전에 연이어 도전했으나 예심 탈락이라는 초라한 성적뿐이었다. 수기와 사례 부문의 입상이 글쓰기를 지탱하는 작은 동력이 되었으나 순수문학과는 거리가 있기에 작가의 길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실감하였다. 연이은 탈락에 무엇이 부족하며 어찌 채워야 하는지 고민하였으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공모전 응모 동기 또한 내 글의 부족한 부분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함이었으나 수백, 수천 편이 응모하는 현실을 도외시한 철부지 생각이었다. 고민이 깊어가던 중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께 내 글이 전달되어 조언을 구할 기회가 생겼다. 원고지 뒷면 하나 가득 언급하신 지적과 격려의 말씀은 깜깜한 터널 속의 나에겐 그야말로 한 줄기 구원의 빛이요, 감로수요, 평생 지녀야 할 금과옥조였다. 구성의 열악함, 담으려는 내용이 많아 주제가 취약해지는 점 등 세세한 지적과 함께 격려의 말씀도 빼곡히 적어주셨다. 글쓰기 공부에 참고하라며 커다란 쇼핑백 하나 가득 담아주신 저서와 수필집은 지금껏 받아본 적 없는 최고의 선물이요,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포만감을 안겨주었으나 그 무게만큼 각오 또한 단단히 해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도 담겨 있었다.


다시 바라본 한쪽 길 저만치에서 누군가 내게 손짓을 하고 있다. 망설이고 있는 내 마음을 잘 안다는 듯 내가 이 길을 가봤으니 두려워 말고 나와 길동무하여 같이 가자 손짓한다. 그래, 저 길로 가자. 언제까지 망설이고 있을 순 없다. 혼자 가기 외롭고 두려운 길 먼저 가본 그를 의지하며 따라가자.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그가 나를 일으켜 줄 것이다. 장엄한 지평선을 만나려면 얼마를 더 가야 하고, 해거름 녘 노을은 어디가 볼만한 지 귀띔도 해 줄 것이다. 그와 함께 종착지에 이르면 누가 아랴, 다른 한쪽 길로 걸어온 나 같은 벗을 만나 달빛 아래 술상을 마주하고 지나온 길 서로 풀어내며 술잔을 기울이게 될지. 혹여 오래전 노란 숲 속의 두 갈래 길에서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들의 발자취가 적은 길을 선택한 노시인을 만나 내 오랜 궁금증을 풀 수 있을지….


“그때가 당신께서 눈부시게 빛나던 청춘이었는지, 삶의 이치를 깨달은 노년이었는지, 가지 않은 한쪽 길에 아쉬움은 없었는지, 두 갈래 길을 다시 마주쳐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인지…”. 내게 손짓하고 있는 그에게로 다가가는 내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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