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떤다. 고교 선배 T형이다. 고교 입학 후 첫 수업 시간, 내 어릴 적 아명이 호명되어 대답할 뻔했다. T형의 동생이었다. 그 인연으로 친해졌다. 한번 만나자고 한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형과 약속한 장소로 가며 무슨 일로 보자는 지 짐작해 본다. 일자리 때문이라면 힘닿는 대로 도와주리라. 자주 가는 식당에서 주문을 마치자 물 한 잔을 다 비운 T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뭐냐고 물으니 대답 않고 내용물을 확인하라 했다. 육백만 원 수표 한 장이었다. 이게 무슨 수표냐는 말에 말문을 열었다.
'10여 년 전 회갑을 맞던 해에 앞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남은 시간 동안 정리해야 할 일은 꼭 정리하고 생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돈은 네 어머니에게 빌려 가 생전에 돌려드리지 못한 돈이다.’ 40대 초반에 건축사업을 하던 중 스무 채가 넘는 연립주택 건축공사 완공 직전에 돌아온 어음을 막을 자금이 부족하여 어머니에게 빌려 간 돈이라고 했다. 어머니를 뵙기 전에 내게 전화했다고 하나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들은 바도 없고, 또 그만한 돈을 갖고 계셨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그때 부모님은 은평구 단층 양옥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형님과 지내고 계셨다. 나 역시 결혼 후 따로 살며 소액의 용돈 외 그만한 액수를 모을만한 여윳돈을 따로 드리지 못했다. 형님과 누님은 아는 게 있는지 물어보리라 생각했다.
이 돈을 어떻게 마련했냐는 물음에 지난 5년간 매월 10만 원씩 모았다고 했다. 30년 전 육백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지만 지금 T형에겐 더 큰돈이다. 임대 아파트 입주로 주거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외식업에 종사하던 형수도 코로나로 인해 일자리를 잃어 현재 월 150만 원 정도의 수입으로 생활을 꾸린다고 했다. T형에게 이 돈은 6천만 원이나 다름없는 금액이다. ‘어머니 돈이고, 형에게 6천만 원과 다름없는 이 돈을 어떻게 할지 누님과 형님이랑 의논해 보겠다.’ 하고 헤어졌다. 조금 전 만났을 때보다 돌아서는 T형의 표정과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사무실 복귀 후 누님과 형님에게 전화로 얘기하고 주말에 산소 다녀오는 길에 들르겠다고 했다.
이런 일이 있기까지 T형은 우리 가족과의 관계는 좀 특별하였다. 치매를 앓고 계신 할머니와 마음 편치 않은 서울 생활을 하던 T형이었다. 우리 가족과 교류하며 여유롭진 않아도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과 자식처럼 대해 주는 어머니에게 늘 그렸던 가족의 모습과 엄마의 정을 느낀다고 했었다. 평생을 교육자로 지역 내 신망이 높고 병석의 아내를 보살피며 칠 남매를 키운 T형의 아버님도 엄마의 역할까진 대신하지 못하셨다. 형의 졸업식 날, 형의 가족 대신 어머니가 꽃다발을 선물하고 함께 졸업 사진을 찍은 것도 그런 사정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서대문구 문화촌(지금의 홍은동)에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하였다. 처음으로 서울에 마련한 우리 집이었다. 이사한 집은 손볼 곳이 많았다. 이사를 도운 T형은 다음 날, 도구를 챙겨 와서 천장을 뜯어내고 새로 만들어 붙이고 도배까지 혼자 다 했다. 비록 전문가의 솜씨는 아니어도 그 집에 사는 동안 아무 불편은 없었다. 이 일로 우리 가족과 한 식구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 주말, 산소에 들렀다. 품에서 떠난 지 삼십 년이 지나 돌아온 녀석을 맞이한 어머니 심중은 어떠하실까. 봉투를 상석 위에 놓고 두 번의 절과 함께 녀석의 귀환을 고했으나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대신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하려무나.' 하셨을 어머니 말씀을 전하는 듯했다. 큰 누님과 형님도 알지 못하고 이웃에게 빌린 것도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독일 누님이다. 70년대 초반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간 둘째 누님은 결혼 전까지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돈을 보냈을 것이다. 그 돈을 모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자식 같은 T형의 다급한 사정과 분양만 되면 바로 갚을 수 있다는 말에 차마 돈 없다는 말씀은 못 하셨으리라. 다만, 그때 내어준 돈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30년이 더 걸릴 줄이야 어찌 꿈엔들 상상이나 하셨을까.
'엄마가 살아계셨어도 그 돈을 다 받진 않으실 거다. 나도 그 돈을 나눠 받을 생각이 없다. 사정이 어렵다고 하니 절반은 돌려주고 나머지는 네 형과 의논해 보려무나'. '그때 무슨 돈으로 빌려주셨고, 왜 말씀도 안 하셨는지 모르겠다. 어머니 돈이고 아직 돈의 출처를 모르니 성급하게 돈을 처리하지 말자. 백만 원 정도면 모르겠으나 절반을 돌려주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산소 다녀오는 길에 만난 누님과 형님의 생각이었다.
T형을 만난 지 열흘이 흘렀다. 가까운 지인에게 이 돈의 용도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가족여행을 권했다. 처음엔 소모성 비용으로 지출하는 건 아니라 생각했으나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팔순이 머지않은 누님과 칠순을 훌쩍 넘긴 형님이다. 다 같이 가족여행 한 번 못한 우리 가족이다. 지난해 독일 거주 작은 누님의 방문 시 다녀온 제주도 여행도 매형과 내가 함께하지 못했다. 가족여행으로 우애를 돈독히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삼십 년 넘어 간신히 귀환해 온 녀석을 단 며칠간의 경비로 소진한다는 게 왠지 마음에 걸렸다. 생전에 혼자 애태우셨을 어머님을 생각한다면 ‘그래, 잘했구나’라고 하실만한 일은 없는지 좀 더 고민해 봐야겠다. 또 칠십 노인네 네댓 명이 가볼 만한 여행상품으로 어떤 게 있는지 한번 물어보기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