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릴케가 그의 시 '가을날'에서 이틀만 더 달라고 간구(懇求)한 남국의 햇빛은 결코 올여름 같은 햇빛 은 아니었을 것이다. '극한폭염'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만큼 지독했던 더위도 처서 (處暑)와 백로(白露)를 지나자 그 기세가 한풀 꺾였다. 지금까지 ‘불볕더위’, ‘폭염'으로 최상급 더위를 표현하였으나, 오죽 했으면 거기에 '극한'이란 수식어를 덧씌었을까. 올여름은 더위뿐만이 아니었다. '극한 호우'도 있었다. 기상청은 짧은 시간 동안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 극단적 호우를 극한 호우(極限豪雨)라는 신조어로 명명하였다. 집중호우의 큰 형님뻘인 셈이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이상 기후 현상의 산물로 어느 특정지역 할 것 없이 전국에 걸쳐 산사태, 제방 붕괴, 하천·계곡 범람의 피해를 초래하였다. 산기슭에 자리한 근무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사진 야산의 토사가 극한 호우의 물줄기에 쓸려 내려와 축대벽 너머 단지 안으로 쏟아졌다. 경미한 산사태였다. 이 반갑잖은 불청객을 치우느라 이틀 동안 직원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려야 했다. 그런 여름도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간간이 들려오는 태풍 소식이 추석이 가까웠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상 기후 현상으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따져보려는 생각은 없다. 강대국과 약소국, 부자와 빈자를 불문하고 원인 제공에 있어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확연히 달라진 기후환경을 체감하며 생의 후반기에 있는 우리는 그렇다 하더라도, 후손들은 어떤 상황을 맞이할까? 불안하고 불편한 상상을 떨치지 못한다.
어릴 적의 사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각기 나름의 계절다웠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봄, 가을이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졌다. 석 달 간격으로 순환하던 계절의 주기가 흐트러진 것 같다. 이번 여름의 극한 호우, 극한 폭염처럼 올겨울 극한 폭설, 극한 추위를 맞닥뜨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랴? 이러한 지구환경의 변화와 이상 기후를 연구하며 닥쳐올 기후 재앙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다. 또 기관이나 단체 또 나라마다 쏟아내는 대응 정책이 한둘이 아니다. 화석 연료 탄소 배출 제한, Re100 등이 대표적이다. 탄소 배출은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으로 배출되어 온실효과 같은 현상을 발생시킨다. 2050년까지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탄소중립을 실현하고자 합의하였다. RE100은 기업이 필요한 전력을 2050년까지 전량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구매 또는 자가 생산으로 조달하겠다는 자발적 캠페인이다. 지구가 앓고 있는 열병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의식이나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으나 그 효과를 아직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올여름 같은 극한 호우, 극한 폭염으로 잃어버린 게 많다. 어릴 적 여름의 추억이나 삼한사온의 정겨운 겨울을 더는 만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극한 폭염으로 잃어버린 것에 비할 수 없으나 소소하나마 얻은 것도 있었다. 3년 전 겨울이었다. 단골로 이용하는 화원에 불이 났다. 보온을 위해 피워 둔 연탄난로의 과열 때문이었다. 주말 아침, 화재 사실도 모르고 들른 화원의 모습은 처참했다. 탄 냄새와 함께 화원 내부는 어질러져 있었고, 비닐하우스 천장은 절반 이상이 불길에 사라지고 그 자리엔 냉기 가득한 파란 겨울 하늘이 차지하고 있었다. 화초 돌보느라 종아리에 도드라진 하지정맥류 치료를 위헤 병원 갈 짬도 없다던 화원 주인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안쓰러운 마음에 화분 하나라도 팔아주려 다시 찾아간 날, 개화 시기도 아닌데 꽃을 피운 화초가 많다고 말하는 여주인의 얼굴에 어린 허탈함과 씁쓸함을 읽을 수 있었다. 화재의 열기에 계절의 변화를 읽어내는 화초의 자율신경계에 착각과 혼란이 생긴 탓이었다.
이번 여름, 집에서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 공기정화 효과가 있다는 화초 몇 개를 거실에 두고 가끔 물을 주는 정도로 관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 눈에 비친 모습이 발코니에 둔 화초에 비해 윤기가 없고 시들해 보여 '그래,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번 여름엔 햇볕이나 실컷 쬐려무나' 하는 마음에 발코니에 내다 놓았다.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며 햇살을 받게 하고, 뜨거운 한낮에는 버티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어느 해보다 에어컨과 친했던 여름이었다. 에어컨으로 낮춰진 실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발코니의 모든 창을 닫고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의 문을 열면 얼굴에 닿는 열기가 건식사우나 같았다. 발코니에 밤새 고스란히 갇혀 있던 열대야의 열기였다. 그렇게 한 열흘이 지났을까? 화초의 모습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 열기가 화초의 발아와 생장을 촉진시킨 것이다. 뱅갈고무나무가 대표적이었다. 거실 한쪽에서 간접 햇볕이나 전기불빛,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이나 쐬던 녀석이다. 그동안 햇볕을 쬐지 못해 쌓인 울분을 한꺼번에 토해내듯 그 열흘 남짓에 새로운 잎사귀를 연거푸 몸통 밖으로 밀어내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 지난 7년간 참아온 울분을 토해낸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의 마음이 저랬을까? 키에 비해 빈약해 보였던 몸집도 새로 돋아난 새순과 새잎으로 제법 커져 보였다. 새로 돋아난 연두색 새잎이 마치 새로 산 화사한 봄 옷처럼 보였다. 발코니 창 쪽으로 밀어놓은 다른 화초들도 마찬가지였다. 녹보수, 알로카시아도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새순과 새잎을 쭉쭉 뱉어내었다. 발코니 모든 화초에 생기가 돌았다. 식물의 생장 요소가 넘쳐났던 여름이었다.
올여름, 이상 기후로 지구가 극심한 몸살을 앓았으며, 어린 시절 계절별로 켜켜이 쌓아둔 추억도 하나둘 사라져 간다. 이상 기후로 많은 것을 잃었으나, 발코니 화초에서 새로운 생명이 솟아남도 발견한 여름이었다. 득과 실, 좋은 일과 나쁜 일,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처럼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음이 세상사 이치이다. 어떤 상황이나 현상을 당면하더라도 단면으로만 섣불리 단정짓는 편협함을 경계하고 이면도 살필 줄 알아야 함을 화초가 일깨워준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2024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