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유감
사람의 일생을 계절에 비유한다면 봄은 유아에서 10대, 여름은 20~30대, 가을은 40~50대 겨울은 60대 이후가 되지 않을까? 백세시대인 점을 고려하여 십 년 정도 뒤로 늦추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을 것 같다. 이 계절을 색으로 표현하면 각기 어떤 색일까? 봄은 초목의 생기가 도는 푸릇푸릇한 초록과 연두색, 여름은 뜨거운 태양을 상징하는 빨강이나 푸른 바다의 청색 또는 파란색, 가을은 들판의 누런 벼 이삭을 닮은 황금색이나 알록달록, 울긋불긋한 단풍의 황갈색이 어울릴 듯하다. 그렇다면 겨울은 어떤 색일까? 하얀 눈, 잿빛 하늘을 생각하면 흰색, 회색이 아닐까 싶다.
각각의 색이 갖는 의미도 다양하다. 초록, 파랑은 희망, 빨강은 뜨거움과 열정, 단풍(황갈) 색은 화려함, 흰색은 순수함이다. 사람의 일생, 삶의 과정 또한 이 색의 의미와도 어울리는 듯하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흰색을 선호했다 하여 백의민족, 즉 흰옷을 입은 민족으로 알려져 왔다. 백색은 순수함과 정결함을 상징하므로 오천 년 역사 속에서도 단일민족의 혈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점과도 상통하는 것 같다.
개인마다 선호하는 색이 다르고 또, 나이, 성별, 계절과 취향에 따라 차이가 있음은 옷차림에서 알 수 있다. 다양한 색 중에서 공통으로 선호하는 색 중 하나가 검은색이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이면 거리에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은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둘 중 하나, 셋 중 둘 심지어 다섯 중 다섯 모두가 입고 있는 옷의 색상이 검은색인 경우도 있다. 검은색 옷이 많은 것은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검은색은 흰색과 달리 햇빛을 흡수하기에 겨울철 보온에 도움이 되며 또 어떤 자리에서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점에서 선호하며 잦은 세탁의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검은색은 한편으로 어둡고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례식에 갈 때 검은색 옷을 입는 것은 고인에 대한 존경, 깊은 애도와 슬픔 그리고 유족에게 공감을 표하는 의미로 입는다. 또 장례식의 엄숙한 분위기에 적합하며 의식의 격식을 유지하는 데 어울리기 때문이다. 반면 검은색은 디자인 분야에서는 세련됨과 우아함을 표현하는 색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기도 한다.
어느 유명 의류 메이커에서 우리나라 10대들이 선호하는 색상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10대가 가장 많이 구매한 색상은 검은색으로 10명 중 4명이었고, 또 나이별로 가장 좋아하는 옷 색상을 묻는 조사에서도 10대가 검은색을 가장 많이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10대 청소년들이 유독 검은색 옷을 찾는 이유로 관리가 편하다는 실용적인 이유보다는 또래들과 비슷한 옷차림을 하려는 심리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 잘 알려진 유명 브랜드의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롱패딩이 유행하여 같은 브랜드의 똑같은 옷을 입고 친구들과 다니는 고교생들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검은색 때문에 아찔했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느 해 겨울 늦은 귀가 때였다. 아파트 단지로 통하는 도로는 조명이 그리 밝지 않아 다소 어둑하다. 늘 다니는 길로 늦은 시각에도 오가는 사람도 있음을 알기에 속도를 줄이고 주차장 입구로 진입하려는 순간이었다. 단지 내 도로에서 우회전 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바로 좌회전해야 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주차장 입구를 주시하며 운전대를 왼쪽으로 꺾은 순간 조수석 앞쪽에서 뭔가 뒤로 넘어지는 듯했다. 부딪힐 때 나는 둔탁한 소리나 비명을 듣지 못했기에 ‘뭐지’ 생각하며 차에서 내렸다. 사람이었다. 육십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깜짝 놀라 괜찮냐고 물었다. '좀 천천히 가지 그랬어요' 하며 본인도 차가 피해 가겠거니 생각하다 뒤늦게 다가오는 차를 보고 황급히 뒷걸음질 치다 넘어진 것이라 헸다. 딸네집에서 건네받은 비닐봉지 속의 탕약이 터졌다며 툴툴거렸다. 괜찮다는 그녀를 X-ray라도 찍어보자며 차에 태워 인근 병원으로 갔다. 검사 결과 다행히 넘어질 때의 찰과상 외 별다른 이상이 없어 가벼운 처치로 끝났다. 약봉지가 터져버린 약을 다시 지어야 한다기에 약값을 보상하고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평소보다 늦은 귀가 이유를 묻는 아내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밤에는 제발 검은색 말고 밝은 색 옷을 입어라 했다. 그 후 만나는 사람들에게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어두운 밤거리의 검은색은 눈에 잘 띠지 않는다. 보행자나 운전자 모두 주의가 필요하다. 겨울철, 야간에 일어나는 교통사고는 운전자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검은색 옷차림이 한 원인이기도 하다. 눈 내린 날이 아닌 겨울 특히 저녁이나 야간에 외출하는 경우, 유행이나 실용보다는 서로의 안전을 위해 검은색 대신 흰색이나 밝은 색의 옷차림을 하는 지혜로움의 발휘가 필요하고 또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