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나무는 말이 없다

아파트 민원 유형

by 애기타

금요일 오후, 평일보다 업무의 긴장감이 다소 느슨해져 있을 때였다. 40대 초반의 입주민이 방문했다. 출고 2주 차인 본인의 외제 차량 손상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였다. 본인의 주장으론 퇴근 후 모과나무 아래 주차했는데 모과가 떨어져 차량이 손상되었다며 빠른 보상처리를 요구했다. 자세한 경위 파악을 위해 마주 앉았다. 민원인은 단지 내 주차구역에서 발생한 사고이며 모과 낙과 주의에 대한 안내문도 없었으니 명백히 관리 소홀, 부주의에 해당하므로 이는 관리소에서 보상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공동주택은 영업 배상 책임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이런 경우 본인의 보험으로 선 처리 후 보험사의 구상권 행사 시 단지 측에서 대응하는 통상의 처리 방법에 대해 안내하였으나 그럴 의사가 없다고 했다. 관리소 측에 책임이 있는 사고이니 아파트 보험으로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본인의 주장에 대해 하나씩 되물었다.

첫째, 모과 낙과로 인한 피해라고 단정 짓는 근거는 무엇이냐에 대해 사고 당일 새벽에 소유차량에 장착된 충격 감지 시 자동으로 녹화 기능이 있는 블랙박스가 작동되어 녹화되어있음을 근거로 들었다. 15초간 녹화 기능이 작동되었고 이는 블랙박스 이벤트 녹화 기능이 모과가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작동된 것이라 주장했다.

둘째, 그렇다면 모과 낙과 장면이 블랙박스 영상에 있느냐는 물음에는 차량의 측면에 떨어져 전방과 후방만 촬영되므로 블랙박스에 녹화된 것은 없다고 했다.

셋째, 차량에 손상을 가한 모과를 가지고 있거나, 사진 찍은 게 있느냐는 물음에도 없다고 했다.

모과 낙과 피해라고 단정할 수 있는 물증이 없으므로 보험 처리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얘기하고 차량의 손상 상태를 확인하고자 주차되어 있는 장소로 가 차량을 살펴보았다. 운전석 뒷문 상단의 에이필러 부분에 충격에 의한 것으로 보아는 자국이 두 군데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유심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기 쉽지 않은 정도였다. 어른 두 주먹 크기의 모과에 의한 충격이라면 저 정도 흔적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값 비싼 외제 차의 강판이 그 정도의 충격도 감내하지 못할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적이 있는 곳을 만져보려 했으나 완강히 거부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파트 가입 보험으로 처리해야 함을 대표자 회의에 보고 후 접수하겠으나, 사고 피해에 대한 입증책임은 피해자가 부담하는 것임을 설명하고 경험상 확실한 물증 없이 보험 처리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 빠른 접수 후 사고 접수번호만 알려 주면 바로 수리를 맡긴다고 했다. 비용 부담이 발생할 수 있는 사안이기에 다소 시간이 소요되나 협조를 구하겠다 하고 면담을 종료했다.


내심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차량의 흠집은 두 군데였다. 본인의 주장대로라면 모과 두 개가 떨어져 두 곳에 흠집이 난 것이어야 했다. 민원인은 충격 감지로 인해 블랙박스가 15초간 자동으로 작동되었음을 주장하고 이를 모과 낙과의 근거로 주장했다. 그렇다면 녹화영상이 두 개가 있어야 했다. 피해 차량 소유주는 자동 녹화기능이 두 번 작동되었고 두 건의 녹화 영상이 저장되었음을 언급해야 했으나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모과 열매가 단 일각의 시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폭이 5㎝도 안 되는 에이필러 위에 떨어졌아야만 본인의 주장이 성립되는 것이다. 과연 그 확률이 얼마나 될 것이며 또 가능할까 하는 점이었다. 보험사 손해사정인의 판단은 어떠할지 궁금하였다.

보험사에 사고 발생통지서 외 생각을 정리한 의견서 한 장을 첨부하여 팩스로 보냈다. 다음 날 보상팀 담당자와 사고 경위와 처리 절차를 서로 확인한 다음, 민원인에게 접수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관리소의 역할을 종료하였다. 며칠 후 별도의 물증 없이 피해자의 주장만으로는 보상 처리할 수 없음을 알렸으나, 수용하지 않는다는 보상담당자의 연락을 받았다.

민원인으로선 억울함이 있으리라. 출고 2주밖에 안 된 외제 신차에 흠집이 생긴 것도 속상하건만 보험 보상도 받지 못한다는 현실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할 물증이나 증인도 없다. 사건의 경위를 아는 것은 오직 그날의 사고 현장을 지켜본 모과나무뿐이다. 그러나 어떡하랴. 모과나무는 말이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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