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이 시간에 웬 알람인가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4시 50분. 이게 무슨 알람인가 잠이 덜 깬 머릿속을 더듬어 본다. 그랬다. 출국 하루 전날 설정해 둔 알람이었다. 다음날 출국을 위해 늦어도 오전 여섯 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여행 성수기라 출국 수속이 지연될 수 있음을 감안해 집에서 나서야 하는 시간보다 한 시간 전으로 알람을 설정했었다. 이곳 뒤셀돌프 누님 집에 도착한 게 지난주 금요일, 꼭 일주일 전이다. 알람을 해제하지 않은 탓에 같은 요일 평소보다 이른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여 독일 고속열차 (ICE)로 갈아타고 뒤셀돌프 중앙역에서 마중 나온 누님, 조카와 택시로 집에 왔다.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높은 이곳의 늦가을 날씨는 한국과 달리 흐리고 간간이 비를 뿌리는 날이 많다. 다행히 도착한 다음 날, 흰구름 몇 점뿐인 청명한 하늘이다. 벼르고 있었던 정원 정비, 하늘로 솟아있는 체리 나뭇가지(우듬지)를 잘라내고 곳곳에 숨어있는 가시 돋친 덩굴장미 줄기를 솎아내고 화분의 꽃들을 화단으로 옮겨 심었다.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서멘트와 몇 가지 장비를 구입하여 지하 창고 지붕 수리를 마칠 때까지 하늘이 도와주었다. 잠시 비를 거둘 테니 온 김에 할 일 다 하고 가라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지난 일주일 간 꼬박 매달렸다. 몸은 다소 고단했으나 마음은 흡족했다.
오래전 매형이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난 후 늘 마음이 쓰이는 누님과 조카의 독일생활이었다. 비행기로 열세 시간 넘게 타고 와야 하는 먼 곳이라 기껏 일 년에 한 차례 그것도 연말에 잠시 다녀갔으나 이번 방문은 3주 일정으로 온 것이다. 무리하지 말고 그만하라는 누님의 걱정을 흘려들으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어둑할 때까지 일을 했다. 그동안 10여 차례 이상 왔었고 주변국 여행도 했기에 이번에는 별도 여행은 고려하지 않았다. 손봐야 하는 일이나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하고 오겠다는 생각이었다. 열흘 남짓으로는 여행을 다녀오면 일할 시간이 부족해 체류하는 동안 마무리 못할 일은 손을 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출발 전 터키 안탈리아 여행을 알아보는 중이라는 누님에게 알아서 하라 하고 나름 손볼 일에 필요한 몇 가지 물품을 가져왔고 도착 다음 날부터 벼르고 있던 일을 하느라 일주일을 바쁘게 보냈다. 다행히 일의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또 에세이 연재 마지막 회차인 1월 호 원고도 이곳에서 최종 퇴고를 끝냈기에 누님이 계획한 터키 여행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다. 두 달 더 연장한다는 메일을 받기 전까지는..
이번 독일 누님 방문은 따로 의도한 게 있었다. 오래전부터 책을 한 권 쓴다면 어떤 내용으로 쓸 것인가를 생각하다 전후세대인 우리 60, 70세대의 자전적 이야기를 문학적 기준과는 관계없이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에 일제의 압제 하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내고 해방 후 찾아온 사회적 격동기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두 번의 혁명을 거치며 살아오신 부모님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책 한 권의 분량은 충분하리라는 생각이었다. 이후 짬짬이 글을 써 블로그에 저장하였다. 그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축으로 독일 누님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직장 생활 36년을 마감하고 두 번째 직업으로 주택관리사 자격으로 취업했던 그 해 중장년 재취업수기 공모전에서 생각지도 못한 대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상을 받은 김에 책을 한 번 써보라는 권고를 한 사람이 바로 독일 누님이다. 그 권유가 글을 쓰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등단으로 이어진 된 것이다. 이번 방문을 통해 파독 간호사로 오기까지의 배경과 50년 세월을 보낸 누님의 독일 생활에 대해 듣고 내 토막 난 기억을 퍼즐(Puzzle)의 조각을 완성하듯 채우고 싶었다.
독일, 뒤셀도르프, 뮌헨. 나와 우리 가족, 우리나라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경제개발을 계획하였으나 이에 필요한 돈이 없었으며 돈을 빌려주겠다는 나라도 찾기 어려웠다. 타고 갈 비행기 한 대 조차 없는 나라의 국가수반에게 비행기를 대여해 주고 노동인력을 채용하고 그들의 임금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나라가 독일, 당시 서독 정부였다. 그 후 국가 간 협약 체결로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누나와 형들이 가난의 유산을 떨쳐내고자 혈혈단신으로 병원 영안실과 1,000M 지하 갱도에서 눈물과 땀을 쏟았던 곳이 바로 이곳 독일이다. 파독간호사로 독일로 온 둘째 누님이 타고 온 비행기가 착륙한 곳이 이곳 뒤셀도르프 공항이었다. 누님은 이곳의 대학병원에 배치되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반세기 독일생활이 시작되었고, 일 년 후 파독광부로 온 매형은 광산도시 보훔의 탄광에 배치되었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매형은 애환 어린 독일 땅에 묻혔고 누님은 칠십 중반의 나이로 우리 가족에게 아픈 손가락인 조카와 함께 노후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곳이 이곳 뒤셀도르프이다.
IMF 환란으로 인한 모기업의 경영 위기 극복을 위해 근무하던 회사가 매각되어 독일 국적의 글로벌 기업에 합병되었다. 50년 역사의 토종 금융기업이 졸지에 뉴욕증시 상장을 앞둔 글로벌 기업의 일원이 되었다. 감사부문의 책임자였기에 매 2년마다 본사 개최 감사회의(Audit Conference)에 세계 40여 개국의 감사책임자들과 함께 3-4일간의 연수 겸 회의에 참여해야 했다. 그룹 본사가 있는 곳이 뮌헨이었다. 그 덕분으로귀국 길에 뒤셀도르프 누님 집에서 일주일 가량을 머물다 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독일로 와 누님집에 기거하며 대학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한 조카가 근무하는 'B'사의 본사도 이곳 뮌헨에 있다.
독일, 뮌헨, 뒤셀도르프는 그런 인연으로 이름만 들어도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는 나라, 도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