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추방, 한별청 지음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보지 못한다. 타자는 에고가 타자 안에서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계속 왜곡된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세게를 오로지 자신의 음영으로만 지각한다.
그 불행한 결과가 타인의 소멸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P.37
진정성은 신자유주의의 모든 광고들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진정성은 오직 자기 자신과만 같을 것,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할 것,
자기 자신의 저자이자 원작자일 것을 강요한다. …
그럼으로써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관계를 첨예화한다.
P.34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과 「피로사회」를 읽고 현대사회에서의 타자의 진정한 역할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타자의 부정성이 사라진 현재, 긍정성의 과잉으로 우리는 익숙한 것들로부터 익사하고 있음을. 이원성을 통해 대립되는 사고에 대해 수용하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이에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이라는 주제로 긍정성의 비대와 나르시시즘의 타자의 부재에 대해 다뤘다.
크게 두 분류로 현상의 원인을 제기했을 때, '나르시시스트의 증대로 인한 타자의 부재'에 대해 숙고해보고 싶었다. 오늘날의 사회는 나르시시스트들의 결속이라 정의해도 무방하기 때문에. 다만, 이는 의학적인 진단명이 아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에서 유래된 단어이므로, '자기애성 성격장애'라는 질병과는 다른 의미로 사회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임을 참고하길 바란다.
* 나르키소스: 강의 신 케피소스와 물의 님프 리리오페의 아들 나르키소스는 사랑을 경멸해 수많은 님프들의 구애를 거절했다. 그중, 화가 난 님프 한 명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기도해 그에게 저주를 내리게 했고, 그 저주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자지도, 먹지도 않으며,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을 사랑하다 익사했다. 자신에게 애착을 가진다는 뜻의 나르시시즘은 나르키소스의 영어 이름인 '나르시서스'에서 유래되었다.
먼저 내가 느낀 나르시시스트의 주요 특징을 나열하자면, 첫 번째, 타자가 본인을 시기·질투한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있다는 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왜곡된 우월감을, 타자가 본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패배감으로 받아들인다. 타자가 하는 본인에 대한 칭찬을 그 타자에 대한 약점으로 돌이켜 생각하며, 타자의 조언과 충고는 본인에 대한 부러움에서 발생하는 자격지심이라 여기고 귀담아듣지 않는다.
두 번째, 사랑은 필요에 의한 것이지, 본인의 감각으로 알아차리는 감정의 형태가 아니다. 사회적인 외관조건과 수용가능한 스펙을 바탕으로 자신과의 교환가치에 상응하는 타자를 선정해, 자신을 더 비추어 보이게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자의 자아를 보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타자에게서 찾으며, 타자에게서 보이는 자신의 자아를 사랑한다. 결국, 타자의 진정성 있는 자아가 아닌, 본인의 에고를 타자에게서 찾는 모험이라고 그들의 사랑을 정의할 수 있다. 그 사랑에 있어 타자는 추방되었고, 그는 타자와의 결합에 있어 자신의 모습을 점차 짙게 애정할 뿐이다.
세 번째, 나르시시스트는 경청하기가 불가능하다. 그의 육체는 듣고 있는 듯한 행동을 취하지만, 실제 그의 에고는 경청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청자는 자신을 뺀 모든 이들, 발화자는 본인 한 명뿐이며, 그의 즉각적인 피드백은 사회적인 본인의 가면을 만드는 데 필요하므로, 의무적으로 덧붙일 뿐이다. 만약, 나르시시스트에게 청자가 있다면, 그 타자에게 내밀한 욕구를 갖고,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중에 해당하는 것이지, 그에게 진정한 관심이 있어 경청하는 것과는 다른, 수준 낮은 차원의 '듣기'에 머무를 것이다.
위와 같은 나르시시스트들의 자기애가 현대사회에 팽배해지다 보니, 우정과 사랑에 있어서 고유한 정서를 찾아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각자의 SNS의 인스타에 진정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고, 팔로워수와 팔로잉에 집착하며, 거짓으로 사람을 옹호하고 기댈 뿐이다. 이상화된 자신에 대한 자기애적 왜곡 수준을 유지가 그들의 목적이므로, 무한한 성공욕으로 가득 차 있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관심을 끌려고 애쓰는 자기애성 인격장애 환자(NPD)와는 목적의 방향성이 조금 다르다.
인간관계에서 나르시시즘이 작용하다 보니, 타자의 입장에서 고려하기보다는, 본인의 손익분기점 기준으로 자아의 욕망에 기대는 요즘 시대에, 들끓는 우울과 공황 등의 정신병리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먼저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본인의 욕구에 집중하기보다, 타자의 말과 행동에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때, 우리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덧붙이기보다, 에고를 보류한 채, 그저 타자에 몰입하여 타자의 자아와 이질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이런 기본적인 포용이 없어서 사회문제가 다양화해지고 농도가 깊어지는 건 아닐까? 자신의 에고에 플러스와 마이너스 계산식에 충성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진정, 본인을 사랑하는 건 맞는 걸까. 타자를 망각함으로써 자신이 진정 추구하고 싶었던 인간의 고유 가치를 경험하는 데 도리어 실패하는 건 아닐지. 더 나아가, 현대의 사회문제는 타자의 고통을 인지하면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언급된 '고통의 사회성'에 대해 언급하며, 글을 마치겠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혼자 남아 있다. 고통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된다. 그래서 고통은 자격도 없이 자아와 자아의 심리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책임을 떠넘긴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어떠한 연결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고 만다.
오늘날의 지배 전략은 고통을 사유화하고, 그럼으로써 고통의 사회성을 은폐하여 고통의 사회화와 정치화를 가로막는 것에 주력한다. 정치화는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해체된다. 공공성은 사적 공간들로 분해된다. (p.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