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 시작하게 되어있다

퇴사 후. 일단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부터.

by 이 구름


퇴사후, 거의 일년여간은 좀비처럼 살았던 것 같다. 나루토에 나오는 궁극의 환술 츠쿠요미처럼, 무한 쇼츠요미에 빠져서 하루에 시간을 몇시간씩 버린지 모르겠다. 핑계를 대자면, 관성 때문일까. 정해진 스케줄대로, 출근하고 누가 시키는 일을 하는 일상이 사라지자, 탄력을 잃은 고무줄처럼 널부러진 생활을 꽤 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와중에 집안일이라는 새로운 루틴에 적응도 했어야 했다. 아이를 봐주시는 입주 이모님이 나의 퇴직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퇴직하셔야 했고, 전혀 집안일을 할 줄 몰랐던 나의 좌충우돌 집안일이 시작되었다. 요리할 줄 몰라, 음식 쓰레기 한번 버려본 적 없어, 우리집 주방세제가 물과 섞어쓰는 종류의 세제인 것조차 모르는 나였다. 이모님이 있기도 했지만 내가 본 그 어떤 남자보다 '가정적인' 남편이 가정의 중심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도, 이모님 없이 집을 돌보는 데 익숙해졌고, 점점 집 안에서의 루틴도 잡혀갔다. 운동하는 시간, 집안일 하는 시간, 아이의숙제를 봐주는 시간. 그리고 남는 시간을 널부러있을만큼 널부러있었을 때 내안의 뭔가 꿈틀했다. '이제 뭔가 좀 시작해야 하지 않아?'


막막했다. 이전 업계로 돌아가려면 방법이 없진 않았다. 프리랜서 실장처럼 일할 수 있고, 회사에 갈 수도 있었지만, 남편은 말했다. ‘이왕이면, 새로운 걸 해봐' . 내가 몸담았던 광고업계는 주로 TVCF 중심이었는데, 처음엔 그 규모가 줄더니 AI의 등장과 여러 위기가 겹치면서 굵직한 회사들이 하나둘 사라지기까지 했다. 그 좁아지는 업계에서 다시 몇년간 더 일하는 걸 꿈꾸지 말고 긴인생 새로운 활로를 찾아보라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서랍] 들. 이걸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근데, 이게 어떻게 수익이 되는 거지? 취미생활이 아니라 나의 먹고사는 '일'이 될 수 있을까?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회사에 있었다면 누군가는 방향을 정하고, 누군가는 계획을 짜고, 누군가는 일정을 조율하며 일이 굴러갔을 테지만, 지금 나는 나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유일한 리더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오랫동안 크리에이터로 일하하며 내가 확실히 배운 것이 하나있다.

시작하려면, 그냥 엉덩이부터 붙이고 앉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것.

이상하게도, 뇌는 참 신기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막연하고 답이 없어보여도 일단 시작하면 내가 가진 모든 감각과 자원을 그쪽으로 끌어오기 시작한다. 의식의 나는 발주자처럼 질문을 던지고, 무의식의 나는 팀원처럼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KakaoTalk_Photo_2025-07-25-09-37-41.jpeg [ 우리는 '무의식의 나'라는 뇌의 어느 부분을 팀원으로 데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



그런 경험,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예컨데, ‘신발’에 관심이 생기면 세상의 모든 신발이 눈에 띄기 시작하고 수많은 글자중에서도 신발 관련 문장은 더 크고 진하게 보인다. 아이디어의 과정은, 사실 다다를지 않을지 모르는 목적지로 무작정 항해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의식하는 나' 만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더 큰 무의식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분주하게 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일단 그냥 이곳에 글부터 쓰기로 했다. 나 혼자 쓰는 비공개 일기였다면 ‘엎던 일’로 덮을 수도 있지만, 브런치에 이렇게 기록하는 것은 왠지 누군가와의 약속처럼 느껴지니까. 계획이 생기고, 일정을 정하게 되고, 어느새 일이 되어갈 것 같다. 오늘 아침만 해도 아무런 글감이 없었는데, 이렇게 앉아서 타자를 두드리다보니 벌써 한편의 글이 완성됐으니까.


시작은 별게 아니다. 그저, 오늘의 나처럼 의자를 엉덩이에 붙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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