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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군 Apr 12. 2017

오! 프리지아

 언제부턴가 즐겨찾기 속 쇼핑몰은 나에게 먼 공간이 됐다. ‘3월 여대생 패션’, ‘봄날의 패셔니스타’, ‘개강룩’ 등의 쇼핑몰 광고로 뒤덮인 메일함에서 마침내 봄을 발견했다. ‘근로장학생 합격’이라는 문구가 모니터에 선명하게 떠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메일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 내려갔다. 포털 로그인을 다시 하고 메일 주소가 맞는지도 수차례 확인했다. 틀림없다. 내 가난을 증명하기 위해 발급받은 가족관계 증명서, 건강보험료 증빙서류가 머릿속에 스쳤다. 그것도 잠시다. 입꼬리가 올라가서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볼이 얼얼하게 당겼다.  

   

 새 학기,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생활이 시작됐다. 남들에게는 과제, 공부를 하러 향하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달랐다.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재작년 3월의 여대생 패션’ 위에 노란색 조끼를 걸쳤다. 형광 빛깔의 조끼가 창피했지만 곧 적응이 됐다. 누구보다 눈에 띄는 차림새의 패셔니스타였지만 아무도 있는 취급하지 않았다. 다행히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묵묵히 반납된 도서를 자기 자리에 찾아다가 넣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20시간, 시급 8,000원, 적어도 한 학기 동안 돈 걱정이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오 프리지아, 오 프리지아’, 즐겨 듣는 노래 가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나른한 햇살이 하루의 끝자락에 걸렸다. 버스 정류장을 돌아 한참을 걸었다. 내려서도 한참을 더 걸어야 했지만 지하철이 좋았다. 돈 때문이었다. 55,000원짜리 정기권이면 한 달에 적어도 15,000원은 아낄 수 있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개강총회 안내 문자가 와있다. 동기들로 구성된, 단체 톡방도 개강 총회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없는 약속을 만들어가며 도망쳤다. 회비 만 원을 내고 오랜만에 고기로 배를 채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놀러 온 자리에 홀로 끼니를 때우러 가는 스스로가 싫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느 때처럼 김밥 가게로 향했다. 저녁은 늘 김밥이었다. 김밥의 종류가 다양했지만 선택은 항상 같았다. 그냥 ‘김밥’, 주머니 사정은 김밥이란 메뉴 앞에 다른 수식어가 붙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500원 동전을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렸다. 2,500원에 500원을 더하는 일은 크나큰 사치였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서서, 월세 40만 원, 쌓여만 가는 학자금 대출을 떠올렸다. 매달 생활비를 부치시는 부모님의 얼굴도 그려졌다, 그럴 때마다 항상 조금 더 늙은 모습이었다. 애써 고민에서 빠져나올 때쯤, 돌돌 말린 김밥을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겼다. 비닐봉지 특유의 마찰음이 좋았다.      


  가게를 나서는 순간, 바로 옆 꽃집에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여기에 꽃집이 있었을까? 매일 저녁 들리는 곳 바로 옆, 단 한 번도 눈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언젠가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이 귓가에 맴돌았다. 꽃 이름 같은 건 잘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꽃을 산다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힘겨운 일이니까 말이다. 이곳에서 생활한 지 2년 하고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마주했다. 정말이지 꽃집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유리벽 너머에 펼쳐져있다. 노란 빛깔의 꽃에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상상 속에서 눈앞에 놓인, 작은 꽃다발은 원룸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모니터 옆, 식탁 위 아니면 현관문에도 걸어놓아 보길 반복했다. 어디에 걸어도 노란 빛깔이 방 안에 봄을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무언인가에 홀린 듯, 꽃집 문을 열었다. “땡그라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환상에서 깨어났다. 한참을 바라보던 노란 꽃은 가장 작은 다발의 가격이 7,000원이었다. 한 시간 시급보다 조금 쌌다. 그마저도 근로장학금으로 받는 시급일 때 이야기였다. 삼일 치 저녁과 맞먹는 가격,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조심스레 그 꽃의 이름을 물었다. ‘프리지아’란다. 근로장학금 합격 소식을 알았을 때, ‘3월 여대생 패션’을 보며 인터넷 쇼핑을 할 때 흥얼거리던 노래 속 그 꽃이란다.      


 후회할 줄 알면서도 사치를 부리고야 말았다. 한 손에 꽃다발을 든 채 길을 걸었다. 포근해진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계절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페트병 자르고 물을 담았다. 노란 꽃을 살며시 적셨다. 방 안에서 제일 잘 보이는 침대 옆에 조심스레 세워두었다. 블라인드를 걷고 겨울 내내 닫혀있던 작은 창을 열었다. 방범창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방을 노랗게 물들였다. 3월의 봄기운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김밥을 한가득 담은 입으로 ‘프리지아’를 계속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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