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촉의 심리치료 39_이론이 아니라 본능
모든 생명체의 치유는 그 개체가 지금-여기에서 어떠한 상태인가를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머물고 있는 그 상태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돌아본다. 건강한 생장에 부적합한 환경은 무엇인가, 조화와 균형을 깨뜨린 요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단계에서 다시 건강한 생장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적절한 생장환경을 재구성해주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혼자 설 수 없는 모양새로 변형이 되었다면 안전하게 지지해줄 수 있는 지지대를 곁들여주어서 혼자 설 수 있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생물은 그러한 변화에 맞춰 ‘순응’하며 온전하게 건강한 생장을 하게 된다.
사람의 치유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연륜을 갖춘 유능한 상담가 혹은 심리치료사는 치유 과정에서 내담자들의 상태를 지켜보며 적절한 때에 적절한 개입을 한다. 마음의 문을 외과수술처럼 갈라내고 열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반드시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스스로 열리길 기다려야 한다. 성장과 발달의 어느 단계에서 ‘옹이’가 되어버린 자기 내면의 생채기들, 알고 있지만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건들, 풀 수 없다면서 덮어두었던 문제들을 접촉하면서 스스로 바라볼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참된 나인 ‘자아’의 힘을 키워주어야 한다.
문제 상황을 다시 꺼내보고 직면하게 되더라도 견뎌낼 만할 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치유는 속도를 내며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심리치료사들은 내담자의 내적 성숙이 이루어졌는지, 자아의 강도는 아픔을 견뎌내며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즉 여문 과실로 수확할 때가 되었는지를 보는 것이다.
간혹 마음이 바쁜 사람들, 몸의 요구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자극의 역치를 넘어서 감각적 만족의 강도를 키워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즉효가 나타나는 좀 더 센 것, 좀 더 빠른 것을 찾는다.
사람의 조작을 거쳐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이즈음의 많은 인공적인 상품들, 치료법들이 그 요구에 맞추기 위해 줄지어 나오고 있다. 애매하고 불분명한 상황에서 여러 문제들을 두뇌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대하여 수학적으로 접근하려는 퍼지이론(fuzzy theory)과 인공지능 이론, 인간의 촉감을 대체할 수 있는 바이오센서(biosensor) 등의 신소재들이 바로 그런 데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접촉이 필요한 적절한 때와 지점을 기계가 감지하고 ‘적당하게’ 대신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적 요구와 생활의 필요에 부분적으로 대응해줄 로봇이 공상과학 영화에서처럼 곧 나오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러한 센 것, 강한 것, 빠른 것과의 마주침은 ‘적절한 접점’이 될 수 없다. 그러한 과도한 자극과 양적 공세를 담아내고 감당하기에는 아직 너무 작기만 한 ‘나의 그릇’은 버티고 버티다 못해 깨지거나 그냥 밖으로 넘쳐흘러 나를 압도하여 더더욱 숨 막히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부작용이 넘쳐나고 여기저기서 넘쳐나고 있다. 세상의 변화에는 모두 그때가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각각 자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는데 말이다.
세상의 이치를 다시 생각해본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아무래도 부족함만 못하다.
우리 선조들은 그만큼 아이를 키우는 일이든,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소중한 모든 것들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것, 사람의 기운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작정 손길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때에 적절하게 손길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전통적인 생활 속에서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삶의 지혜들, 촉각 문화이다.
농작물들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다.
쌀 미(米) 자에 여덟 팔(八) 자가 두 번 있는 것처럼 한 알의 볍씨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88번의 농부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한옥의 나무 마루는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아야 윤기를 더하는 법이다.
우리 선조들이 삶의 경험을 통해 전해주는 격언들처럼 우리의 전통적인 의식주 생활 모두에서 그런 촉각 문화가 깃들여져 있다. 먹는 것에서는 김치, 된장, 고추장, 막걸리, 홍어회, 젓갈과 같은 발효음식문화가 대표적이다. 집에서는 구들과 창호문이 우리의 그런 은근한 촉각 문화를 나타내는 풍습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속성인 은근과 끈기도, 고추장의 매운맛, 천천히 데워지고 식는 구들과 같다고 언급하곤 한다. 곰삭은 발효음식이 갖고 있는 독특한 냄새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멀리한다고 생각하던 우리 음식들이 이제는 많이 찾는 음식으로 손꼽히고 있다. 우리 밥상의 차림새도 정갈하게 바뀌어가면서 세계인들과 부쩍 가까워졌다는 것은, 인사동이나 우리 정서를 잘 알 수 있는 서울의 북촌이나 서촌 지역 음식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우리 음식의 은근한 맛과 건강에 유익한 효능에 공감하고 있다.
우리 음식문화에서 촉각을 강조하는 말은 ‘음식 맛은 손맛’이란 표현에 그대로 담겨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든 어머니가 집에서 만들어주는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양인들도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과 같은 때에는 멀리 나가 있던 가족들이 집에 모여서 음식을 나눈다. 음식을 만드는 데에 어머니의 정성이 깃드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같다. 사랑하는 가족이 먹는데 사랑을 담지 않을 어머니가 어디에 있을까.
음식의 맛을 결정짓는 것은 재료와 기법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과 정성을 담은 손길이다. 손맛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그런 마음이 손길로 전해져 만들어진 음식의 맛이다. 가족들을 모이게 하는 그 손맛에 어머니의 사랑이 담겨 있다.
우리 음식을 만드는 데에 많이 쓰이는 말이 ‘적당히’이다. ‘적당히’라는 말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담겨 있다. 가풍, 음식을 나누는 사람들의 기호와 성향, 시절과 날씨, 어우러지는 식재료들과의 상호작용 등이 그런 것이다.
경험으로 체득한 대물림의 지혜를 통해 자기 안에 형성된 ‘전체적인 밑그림’을 염두에 두고 부분은 행위의 주체가 전체에 잘 어우러지도록 조화와 균형을 맞춰 가는 것이다. 가마솥에서 누룽지가 적당히 나오는 맛있는 밥을 짓는 비법은, 주부의 오랜 접촉 체험을 통해 ‘적당히’라는 감각적 숙련에서 비롯된 은근하게 ‘뜸 들이기’에 있다.
요즘 주부 역할에 낯설어하면서, 인터넷과 책에서 음식과 육아 정보를 찾는 까닭은 그러한 접촉 체험을 해보지 않아서 두렵기 때문이다. 음식을 만들면서 서로 다른 재료들이 잘 어우러져 맛과 기운이 잘 스며들어 맛의 상승작용을 일으켜 최적의 맛을 내는 ‘적당한 그때’를 경험으로 아는 것처럼, 아이를 건강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잘 생긴 재목으로 키우기 위해서 접촉의 훈련이 필요하다. 아이의 상태와 반응을 살펴보면서 일관성 있게, ‘적당히’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은 논리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본능적인 반응이다. 접촉을 통한 체험으로 내 몸과 마음에 깃들어져 있을 때, 온전하게 ‘내 것’, 우리 가족, 내 아이, 내 치료적 장에서의 내담자들에 대한 성장과 치유의 맞춤 비방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