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촉의 심리치료 42_둘이 아닌 손길, 손맛
“우리들의 뇌에는 손으로 느끼고, 손을 이용해서 구축하고 발달시킨
사물이나 행동의 기억과 개념이 집적되어 있다.”
―‘손의 외과학’ 체계를 세운 S. 바넬
사람의 삶은 손의 역사다. 생의 출발에서 종점까지 모든 일을 손으로 하고 있음을 새삼 생각하며 신이 작곡과 지휘를 맡고 우리 모두가 연주자가 되어 들려주는 장엄한 협주곡 '손의 노래'를 눈과 귀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느껴본다. 우리 인간의 손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우리는 손으로 많은 일을 해왔고, 손으로 많은 것을 표현했고, 손을 통해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었고, 인간의 손으로 우리 인류와 수많은 삶들의 역사를 이루어냈다. 과학적 사회주의 창시자인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손의 노동이 언어와 함께 뇌를 발달시켜서 사람을 사람답게 했다’고 말한다.
내 손만을 움직여 개별적으로 하는 손의 작업, 손의 행위도 그 나름의 소중한 가치를 갖지만 누군가와 함께 잡는 손과 손은 세상의 바깥 테두리를 더욱 넓게 확장시켜준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손은 바깥으로 드러난 또 하나의 두뇌’라고 표현했다. 손은 뇌의 명령을 받는 운동기관일 뿐 아니라 뇌에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감각기관이기도 하다. 뇌는 손의 감각과 운동 능력을 연결해 손을 더욱 잘 사용하도록 기능한다. 접촉의 도구인 사람의 손은, 어떤 대상과 상호작용하기 위해 메시지를 언어로 전달하는 입이 옮기지 못한, 마음속 마음에 담긴 진실을 전한다. 그런 까닭에 손을 이용한 메시지의 전달은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전형이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아담의 창조’에서 조물주는 아담에게 손끝의 접촉으로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처럼 손과 손을 맞잡고 또 서로 맞닿아 접촉한다는 것은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협력함으로써 스스로 창조하면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 인간의 진화와 지능을 이야기할 때 손을 빼놓을 수 없듯이 사람의 삶은 바로 손의 역사이다.
수많은 삶의 역사가 담긴 숭고한 노역을, 우리는 손이 있었기에 해낼 수 있었다. 신이 창조한 위대한 창조물인 인간에게 손이 없었다면 인간의 오늘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이렇게 수많은 일을 묵묵히 해내며 나와 함께 해준 내 손에 대한 외경심을 가져본다. 내 손을 다시 바라본다. 손에 사랑 나눔과 보살핌의 마음과 정신을 담아 신체심리치료라고 하는 치유작업을 하고 있는 내 손이 내담자들에게 어떻게 해석될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엊그제 멀리서 내게 온 내담자는 이렇게 표현을 한다.
엎드려 누워서 몸의 중간 부분쯤 지나가는데 불교에서 얘기하는 의식이 끊어지는 상태 있잖아요. 그게 전혀 나의 의도가 없었는데도 어느 순간 탁하고 스위치가 넘어가더라구요. 생각이 탁 끊어진 고요한 자리에 한참 머물렀어요. 그리고 돌아누워서 앞에 할 때 느낀 것은 지극한 아니 극진한 사랑이었어요. 다른 언어로 표현하자면 무용에서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만드는 2인무(二人舞)처럼 제가 가만히 있는 대상이 아니라 같이 어우러지는 행위라고 느껴졌어요. 그게 너무 완벽하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걸 느끼면서 터치가 아주 숭고한 것이구나. 선생님의 손길로 이루어지는 그 모든 행위가 엄숙한 구도 행위처럼 느껴졌어요.(울음)
접촉을 기반으로 하는 치유의 기법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명확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이론을 다루어 실제의 장에서 사람으로부터 김동과 변화, 그리고 성장을 이끌어내는 것은 오롯이 ‘전하는 사람’의 몫이며, 그 사람의 손길에 담긴 마음이다. 그것은 사람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농익은, 여유로운 마음이다. 내담자의 몸에 닿아있는 손바닥과 손가락 끝에 마음의 눈을 모아 한 점 한 점 지그시 짚어 멈추고 있노라면 내담자의 몸과 마음의 고통을 그 접점에서 느낀다. 그 순간, 바로 지금-여기의 그 접점에서 진지하고 깊은 인간적인 공감과 소통의 교류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약물과 기구로 우리 몸이나 우리 몸속에 존재하는 이물질, 본래 나의 몸이었으나 변형되어 나를 해치는 것, 또는 병균을 상대로 하는 일방적인 치료행위가 아닌, 인간이 인간을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하며 서로의 대상이 되어주는 소통의 행위이다. 몸이 들려주는 아픔의 메시지를 손을 통해 경청하고, 그 아픔을 사랑의 마음으로 어루만져주며 교감하면서 사랑이 곧 힘과 용기와 지혜가 될 수 있도록 돌려주는 보살핌의 행위이다. 내담자의 손을 잡아주고 아픈 몸을 감싸주고 보듬어주면서 생각과 호흡을 같이 나누며 공감해주고, 삶 속에서의 괴로움마저도 함께 나누어 덜어주는 행위, 이것이 곧 신체심리치료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들의 의미이다.
“화법畵法이 있으나 화리畵理가 없는 것은 옳지 않다. 화리가 있으나 화취畵趣(그림의 정취)가 없는 것도 옳지 않다. 그림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나, 사물에는 변함없는 이치가 있다. 사물의 이치는 일정하나 그 동정動靜에 따라 변화하여 정취가 무한하니 그것이 붓끝에서 나와 비로소 신묘함에 이른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림을 읽다’ 전시회 벽에 쓰인 중국 청나라 때 화가 방훈의 화론서 산정거화론[山靜居畫論]중의 한 부분이다. 이 글을 읽다 보니 사람과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서로 소통하며 성장과 치유를 촉진하고 이끌어가는 심리치료의 장면에서 그 성질이나 모습이 변하는 원인은 치유자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는, ‘치유자 변인[變因, variable]’이 중요하다는 말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그리고 사람의 정성과 사랑이 깃든 손길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바람과 맞닿아 있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변형과 성장에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정성, 그리고 사랑이 담긴 사람의 손맛이 삶의 질을 앞세우는 이 웰빙 시대의 키워드가 되었다. 손은 쓰면 쓸수록 더 잘 쓰게 되고, 장인의 연륜이 오래될수록 사람의 생활에 더욱 쓸모 있고, 몸에 잘 맞아 편하고, 음식은 더욱 맛있게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품평을 귀담아듣고 그 손길에 잘 반영했을까. 그것은 화려한 스펙만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삶의 현장에서 갈고닦은 수련의 참된 공력이다. 그 정성을 담아 손으로 만든 것에선 만든 사람의 솜씨와 함께 마음이 전해온다. 그것이 손맛이다.
“인도의 명상센터에서는 가장 수행이 깊고 순수한 사람이 조리를 합니다. 음식은 그 자체가 사랑이며 생명입니다.”
필자와 오랜 인연인 명상가이자 조리의 도인인 문성희 ‘평화가 깃든 밥상’ 대표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이 시대에 추락한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접촉으로 이루어지는 조리행위와 접촉의 치유 행위는 둘이 아닌 하나의 손맛,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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