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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Dec 19. 2021

눈 오는 날

2021. 12. 18.





 눈이 내렸다. 헤어컷 예약시간을 핑계로 저녁 눈길을 걸었다. 눈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고 우산도 들지 않은 채 나는 눈 속을 걸었다. 처음 생겨난 저녁, 마치 세상에 없던 것이 새롭게 생겨난 것처럼 저녁은 낯설기도 했고, 오래전 거기 그곳 눈길을 걷는 것 같은 기시감에 부르르 몸을 떨기도 했다. 여기저기 창문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노란빛 푸른빛 붉은빛 똑같은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각기 다른 빛, 낮과 다른 형태를 발산하는 창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 불을 켜는 창문도 몇 군데 보였다. 이제 막 외출에서 돌아온 그들이 스위치부터 찾아 불을 밝혔으리라. 고개를 들어 건너편 아파트 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약속이나 한 듯 여기저기에서 이제 막 불을 켜는 창문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골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로등 빛 사이에는 지상으로 하강하는 눈송이가 부유했다. 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30분이 되려면 10분 정도 남았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본격 눈길을 걷기로 했다. 미용실을 비켜지나 걷는 중 전화벨이 울렸다. 미용실이었다.



  “지금 가는 중이에요.”

  “네넹~”



  바삐 미용실을 향하려 할 때, 놀이터에는 눈사람 같은 세 사람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아빠와 아이들. 오래전에 보았던 그림이었다. 눈사람을 만드는 놀이터 아이들을 판화처럼 마음에 새기고 미용실 앞에 섰다.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고 모자에 내려앉은 눈을 털며 미용실로 들어섰다. 미용실 거울 속으로 나는 여전히 창밖 풍경을 엿보고 있었다. 수은등 아래 몰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라는 세상 /이윤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눈은 퍼붓고 쌓이고 나는 얼굴을 바꾸지 못한 지 오래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지 오래

베개가 내 얼굴을 반쯤 파묻어버리도록

나는 사랑하지도 않는 당신이 내 생각을 하는 걸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은 지 오래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의 숫자만큼 눈이 내리고

고드름처럼 얼어붙어가는 나의 침대는 삐걱이고

다시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말들이 쏟아지고

퍼붓고 아우성치고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당신이 되어왔다는 걸 모르지 않은지 오래

우리는 한밤중에 깨어나 당황하여 모르는 척 눈을 감은 채

발을 숨기고 속눈썹을 떤다

누가 지금 당신 생각을 하는가

우리는 지금 누군가 우리가 되고 있는 걸 안다

사람에게로 뛰어드는 눈처럼

눈에게 뛰어드는 사람처럼

우리가 보게 될 세상이 우리 자신이었다는 걸



이윤설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문학동네,2021)'

      




*매일 일기를 씁니다. 매일의 루틴을 만든다는 것, 저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지요.

그 일기 중 하나, 가끔 여기 올려놓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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