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지호와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노란 등 아래서 은은한 형광녹색으로 빛나는 잔디며 더도 덜도 없이 딱 그 자리에 있어 풍경을 미적으로 만드는 수목이 근사해서였다. 더도 덜도 아닌 적절함.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나도 무수한 시안을 버려봐서 알았다. 어렵게 그걸 만든다 한들 반드시 채택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잔디 위 널돌을 밟고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자 1층짜리 단정한 목조주택이 자태를 드러냈다. 더운 나라 건물답게 시원하고 개방적인 느낌을 주는 집이었다. 돈이 아니라 감으로 꾸민 집. 것도 단순한 감이 아닌 훈련된 미감으로 꾸민 데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햇빛과 바람, 빗물에 색이 바래 순한 나뭇결을 드러낸 문틀과 창틀, 고상하되 전혀 기름진 티가 나지 않는 담박한 그릇장, 세간의 배치와 배색, 그럴리야 없겠지만 투숙객이 혹 초록에 물릴까 다홍과 주홍을 살짝 섞은 간이 화단까지, 모든 게 적절했다. 주위를 둘러보다 결국어떤 공간을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낡음’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반짝이지도 매끄럽지도 않은 시간이 거기 그냥 고이도록 놔둔 집 주인의 자신감과 여유가 부러웠다.
언젠가 15번 버스를 타고 강변역으로 나갈 때였다. 3월이었지만 봄인 듯 겨울인 듯한 날씨였다. 나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창밖 봄 햇살에 넋을 놓고 있었다. 봄을 미리 직감한 창밖 3월은 완연한 봄 같았다. 아치울마을 쯤에서 마흔쯤 돼 보이는 여자가 탔다. 좌석이 몇 개 남아 있음에도 승강기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브이넥 아이보리 니트에 블랙캐시미어 롱코트를 걸쳤다. 코트 속 희디 흰 목이 훤히 드러났고 보송보송한 귀밑 솜털이 역광에 맑게 미치고 있었다. 비비크림으로 얇게 마감한 듯한 메이크업, 한 듯 안 한 듯 립스틱도 바른 듯 바르지 않은 듯 맑아도 너무 맑은 그녀의 표정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꾸민 데라곤 1도 보이지 않았지만 얇은 니트에 툭 걸친 겨울 코트는 세련미가 흘러넘쳤다. 그냥 멋졌다. 어쩜 계절에 맞지 않을 수 있는 모직 코트가 그 봄날 3월에 잘 어울릴 수 있다니, 그녀의 감각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김애란의 문장에서 ‘낡음’이라는 단어에 이 문장을 선택했다.
“어떤 공간을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낡음’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반짝이지도 매끄럽지도 않은 시간이 거기 그냥 고이도록 놔둔 집 주인의 자신감과 여유가 부러웠다.”
매끄럽지 않은 시간이 거기 그냥 고이도록, 이라니!
3월에 두꺼운 코트를 걸칠 수 있는 것도 몸에 옷이 고이도록 놔 둔, 맑은 표정에서 흐르는 자연스러움이었을 것이다. 그 두꺼운 겨울코트가 그토록 세련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건 수수하게 흐르는 자신감과 옷을 입은 사람의 여유가 한몫 했을 거란 생각이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문득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