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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Jan 20. 2022

뜻밖의 일

그때는 알지 못했어요





그때는 알지 못했어요. 마음이란 것은 시시때때로 바뀐다 하지만 버스 탈 때의 마음과 내릴 때의 마음이 달라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저녁은 밖에서 먹자고, 버스를 타자마자 카톡을 보내야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잠실 광역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탄 시간은 오후 5시 10분경이었어요. 입구 맨 앞자리에 앉았어요. 앞자리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뻥 뚫린 시야가 확보된다는 것이지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확 트인 풍경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앞자리에 앉을 때면 혼자 앉아서 목적지까지 가게 돼요. 먼저 자리를 잡고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뒷자리로 가거든요. 오늘은 누군가 옆자리에 풀썩 앉더라고요. 뚱뚱하고 키 큰 여자였어요. 롱 패딩에 모자까지 푹 뒤집어쓰고 있더군요. 롱 패딩은 저도 입었어요. 털 달린 모자까지 장착한 두꺼운 구스다운요. 그녀가 앉으므로 두 좌석은 꽉 찼어요. 빈틈이 없어졌죠. 팔을 움직이기가 불편할 정도로요. 자유자재로 공기를 수용하는 두 패딩점퍼는 퍼즐을 맞추듯 좌석을 메워주었지요. 꽤 안정적이었어요. 버스를 탄 이후 처음 느끼는 안온함이었거든요.


 차가 움직이자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버스 안에서 쉬 잠이 들 수 있다니! 나는 그 속에 폭 감기고 파묻혀 안정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새벽예배와 오전 줌 수업 오후 모임까지 풀가동했던 하루는 깊은 나락으로 꺼져가듯 다운되고 있었거든요. 불편한 자리도 편안함에 들 수 있구나! 결핍이 주는 위안은 더 오묘하구나! 피로감이 준 깨달음이었어요.

  마음도 생각도 때때로 어떤 방향으로 치닫게 될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인 듯해요. 삶도 관계도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을 테니 사람을 대하는 감정에도 무거움과 가벼움 그 어디쯤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는 걸 명심해야겠어요. 그저 묵묵히 현실을 흐르다 보면 묵은 감정도 희석되고 휘발되겠지요. 그러면서 단단해질 터이고요. 얼었다가 풀렸다가 얼었다가 풀렸다가 그래야만 황태가 되는, 강원도 산간마을 황태덕장의 겨울나기처럼 말이지요. 덕장에 걸린다 해서 다 황태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백태가 되고 흑태가 되고 파태가 되기도 하죠.


  잘 나가던 의사 토마시가 테레사*라는 여자를 만나 시골 정비사로 살아가게 될 줄 어찌 알았겠어요. 연민으로 시작한 치기가 숭고한 사랑으로 변할 거라는 걸 그 누가 알았겠느냐고요. 옆자리에 풀썩 앉은 그녀를 생각해요. 키 크고 뚱뚱한 그녀는 등받이에 깊이 기댔음에도 마치 걸 앉은 듯 의자 밖으로 몸이 삐져나오더군요. 그 때문에 나는 구석으로 밀렸지만 요람에 든 듯 단잠에 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불편하다 답답하다 느낄 사이도 없이 잠들어버렸거든요. 그녀는 어쩜 옆자리 여자의 안색을 마음으로 살피며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는지도 몰라요. 우린 서로 묵묵히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게지요.

  토마시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가 뭔지 아세요? 연민의 대상이었던 테레사의 위치로 자기 자신을 내렸기 때문이래요.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상대를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테레사를 위해 자신이 아래로 내려갔다는 데 있다는 것이죠. 우리도 버스 앞자리에 앉아 서로의 위치로 내려갔던 거라고 믿고 싶어요. 조금 불편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그건 사랑이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눈을 뜨니, 비켜선 노란 햇살을 매달고 버스는 달리고 있었어요. 무심한 노을빛도 넋 놓고 흐르고 있었고요. 얼른 커튼을 젖혔죠. 내려야 할 곳을 놓친 줄 알았거든요. 아직 강변이었어요. 건너편 반 뼘 정도 남은 햇살에도 저녁은 도사리고 있더군요. 그녀도 나도 도농에서 내렸어요.

 뜻밖의 일, 낯선 경험을 외면한 채 우리는 각자의 길로 가고 있었어요. 그녀도 나처럼 오늘 일을 생각할까요. 좁은 틈에서 서로를 의식한 듯 안 한 듯 그저 수용하고 이해했던 순간을 말이지요. 집으로 돌아와서 저는 남편이 좋아하는 잡채를 만들었네요. 추어탕을 먹으러 가자고 해야지 맘먹었던 것을 뒤집은 건 그녀 덕분이었어요. 쉼은 사고를 유연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미리 볶고 무쳐놓은 당근, 버섯, 시금치나물이 있었기에 잡채가 가능했겠지만, 그 시간 저녁을 준비할 거라는 건 꿈도 꾸지 못했었거든요. 적어도 버스를 타는 순간에는 말이지요.



* 밀란 쿤테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소설 속 인물






* '그때는 알지 못했다'로 첫문장을 시작하여 원고를 쓰기로 했다. 다른 사람은 어찌 썼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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