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항구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그리스인 조르바’ 중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생각했다. 항구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소설 속 ‘내’가 조르바를 처음 만났던 그 장면을 상상했다. 항구도시 코펜하겐에서 거대한 크루즈 실자라인에 탑승했지만 나에게는 ‘내’가 조르바를 만났던 그 항구에서의 스토리는 진행되지 않았다. 옆구리에 산투르를 끼고 있는 조르바는 없었고, 터미널에 도착하여 가이드가 다 진행해놓은 배에 탑승하고 가이드가 주는 키를 받아 객실에 들어가는 일에 급급했던 한 사람만 있었을 뿐이었다. 낯선 땅 북유럽 어느 큰 유람선에 탑승했지만 항구를 탐색하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닥치는 대로 하죠. 발로도 하고 손으로도 하고 머리로도 하고...” 거칠고 호탕하고 기죽지 않고 그러면서 그리스인의 혼을 일깨우는 비범한 인물이었던 또 다른 자유로운 영혼 조르바를 만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다만 나는 코펜하겐 항구에서 오슬로 항구에서 나만의 특별한 스토리를 기대하며 크레타섬의 조르바를 생각하고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 곡괭이와 산투르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손” 조르바를 일컫는 말이다. 나는 여행을 하며 그러한 사람이기를 그러한 영혼의 힘을 가진 사람이었기를, 얼마나 바라고 꿈꾸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어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따라 다니는 시간에 쫓기는 한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니 그 시간들이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깊은 시선이 부족한 탓이다.
주도하는 여행이 아닌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