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gang Feb 13. 2021

풍경이 되다

가족이란

 누군가 지난 1년을 훔쳐갔네요. 그 누군가는 코로나19겠죠. 아니, 우리가 세월을 도둑맞은 건가요?

 아들만 4형제인 시가는 형제들이 다모이면 대가족이 됩니다. 어머님과 한 가정만 모여도 5인이 돼버리니 이번 설에는 형제들이 번갈아가면서 어머님을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엇갈린 시간을 일부로 잡아 어머님을 찾아뵙지만 형제들은 만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5인 집합 금지령에도 부산행 ktx 티켓팅은 하늘에 별따기 같습니다. 겨우 내려가는 표 하나를 구해 남편은 어제 오후 어머님을 뵈러 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저는 두 딸과 남편이 없는 설날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같이 차를 가지고 내려갈까, 고민도 했지만 둘째가 수험생(?)이라 내려가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바람에 남편 혼자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며느리랑 같이 와도 좋지만 내 아들만 오면 더 좋아….”


 30대 때였던 것 같습니다. 연로하신 교회 어느 권사님께서 하신 농담 섞인 이 말이 때때로 귓전에서 울려옵니다. 며느리도 자식이라 여기며 귀하게 여기겠지만, 아들만 오는 것이 때로 더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말에 즉각 동의했고 이해도 됐습니다. 어머님께서 모처럼 좋아하는 아들과 단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오늘은

2014년에 발행한 제 책, 사진이 있는 에세이 <살구나무는 잘 있는지요/해드림>에 수록된 글 한 편을 올려놓습니다.  




풍경이 되다



 오후가 되면서 기차역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대합실 안에는 제각기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날이 아니면 먼지가 뿌옇던 시골 간이역이 주말을 맞아 인근 지역의 학생들로 왁자해졌다.

 3월 꽃샘추위는 한겨울 추위에 버금가게 혹독했다. 나는 교복 위에 코트를 걸쳤지만, 얇은 옷을 겹겹이 껴입었다 해도 스웨터에 의존한 엄마 옷이 얇아 보였다. 그나마 대합실 안에 작은 난로가 있어 다행이었지만 나를 보내 놓고 혼자 돌아가야 할 길이 춥고 허전할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기차가 오면 알아서 가겠다고 했음에도 끝내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개표가 시작되고 대합실에선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엄마도 나와 함께 나란히 줄을 섰다. 그냥 들어가라고 화를 내다시피 했지만, 한사코 따라나서며 역무원에게 차에 짐만 실어주고 나올 거라 얘기했다. 플랫폼에서도 둘은 말없이 웅크리고 서서 기차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흔한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이 그리 깊어 그토록 말을 아꼈을까. 플랫폼에 기차가 들어오고 엄마는 재빠르게 차에 올라 선반에 짐을 올려놓고 내려갔다. 차창밖에 서 있는 엄마의 모습은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 비녀를 꽂은 쪽 찐 머리에 앞 잔머리가 바람결에 헝클어져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앞머리를 귀밑으로 넘기는 순간 기차는 서서히 움직였다. 나는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도 잘 가라는 시늉을 하다 얼른 고개를 젖혔다. 기차는 기적 소리를 한 번 더 울리고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엄마 코가 빨개졌다. 아니나 다를까 눈물을 닦고 서 있는 엄마가 보였다. 기차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엄마는 그대로 붙박여 기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차가 꼬리를 감출 때까지 그 자리 그렇게 서 계셨다.


 그때야 엄마가 흥얼거렸던 노랫말이 다시 생각났다.

 “부럽~구~~나~~~, 공부하러 떠나는 네가.”

 내도록 말이 없던 엄마가 랩을 하듯 그렇게 흥얼거리며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었다. 기차가 몇 정거장을 거치는 동안까지 나는 창밖에 시선을 꽂았지만 뿌연 시야는 금방 맑아지지 않았다. 공부하러 떠나는 네가 부럽다니, 엄마가 그런 말을 하다니, 엄마에게 미안한 생각에 북받쳐 올랐다.

 나는 무의식 중에 엄마를 무시했다. 언제나 ‘엄마가 뭘 알아?’였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인생이란 없었다. 청춘도 젊음도 나는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게 엄마였고 엄마의 삶이었다. 그런 엄마가 대처로 공부하러 떠나는 딸을 배웅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아무런 희망도 불빛도 없는, 보이는 것이라곤, 마당뿐 아니라 마루까지 올라와 휘저어 놓는 닭들과의 전쟁이었고 읽고 싶은 책 한 권도 맘대로 읽을 수 없는 숨 막히는 시골생활을 탈출하는 딸에게 보인 눈물의 의미는 뭘까. 이제 아침마다 깨우느라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되고, 늦잠으로 밥도 못 먹고 내빼는 뒤통수를 향해 지청구를 늘어놓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는 집에서 다니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날마다 몰래 도시를 꿈꿨던 날들이 떠올랐다. 후줄근한 몸뻬 차림에 머릿수건까지 쓰고 부산하게 밑반찬을 준비하며 흥얼거린 쓸쓸한 노래가 자꾸만 들려왔다. 부럽다는 그 말에는 ‘네 꿈을 잘 키워라’ 하는 기대감과 ‘이제 막내마저 품을 떠나는구나!’ 하는 아쉬움에 대한 표현이었을 게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는 지나치리만큼 인색했던 당신이 자식을 위해 전부를 내어놔도 아깝지 않을 뿌듯함에 겨운 기꺼움이 일순간에 몰려와 눈물이라는 언어로 표현된 것이 아니었을까.  

 내 안의 ‘장소의 기억’을 꺼낸다면 파릇한 비린내가 올라오던 내 나이 열일곱 되던, 엄마와의 독립이 시작되던 그해 3월 경전선 진상역을 손꼽는다. ‘우리는 자기 몫의 격랑의 바다를 한 척의 배처럼 건너갈 것이지만, 가족은 그 건너가는 한 척의 배를 그이보다 더 격렬한 고통으로 바라보는 이들이다. (문태준 /이제 오느냐?)’ 아무것도 인정해주지 않은 딸이었지만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 붙박여 서서 안타까이 바라보던 엄마의 모습은 내 삶에 풍경이 되었다.

 엄마가 말을 아낀 이유는 거기 있었다. 말을 아낄 만큼 간절한 기도가 당신의 눈 속에 있었다.  


옥룡사지 동백,  2019


*메인사진은 다압 매화마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