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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May 10. 2021

나는 행복해지기로 결심했다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2014년 4월 파리여행 중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첫선을 봤다. 안정된 직업과 나무랄 데 없는 집안 등 내겐 과분한 사람이었다. 집안 어른의 소개로 이뤄진 만남이었는데 결혼을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어린 나는 결혼 자체가 겁이 났다. 사람의 좋고 나쁨이 아닌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남자의 애프터에 뜸을 들였다. 주말에 보자는걸 선약이 있다고 했더니,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 좋은 사람을 놓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엄마가 언성을 높였다. 남자는 엄마 마음에 쏙 들었던 터였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네가 어떻게 엄마 맘을 이렇게 모르고 네 맘대로 할 수 있느냐고 눈물을 펑펑 쏟으셨다.

 2년 후, 두 번째 선을 봤다. 담임목사님 부부가 소개한 이웃 교회 장로님 아들이었다. 어지간하면 결혼을 해야겠다, 마음으로 다짐하며 맞선 자리에 나갔다. 조건도 그만하면 괜찮았고 아파트도 분양받아 놓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 이리 재고 저리 잴 형편이 아니었다. 네댓 번을 더 만났지만 뭔지 모를 공허가 밀려왔다. 마음 한 자락 가닿는 것이 어려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았다. 대화가 겉돌았다. 이렇게 평생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니 숨통이 막혔다. 그에게 한 달 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서로 각자 기도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3박 4일 휴가를 받아 기도원으로 가버렸다.

 무언가 간절했지만 그 간절함이 무엇인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직장에서도 노조 개입 관련 난감한 상황이었고, 맘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기도하며 마음을 챙기다 보면 방법이 나오겠지, 그런 심정이었다. 기도원에서 돌아오니 그 남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어쩔 거냐’고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다. 그 즈음 사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이 선생, 그런 사람 또 만나기 힘들 건데? 그 남자 생각보다 훨씬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집안 내력이며 경제적으로도 뒷받침이 충분한 그런 집이거든.”

  생각해보겠다는 나의 대답이 만족한 답변이 아니었던가 보았다. 사모님은 실망한 듯 그런 사람 또 만나기 힘들 거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센강의 낭만 그리고 청춘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까맣게 잊었던 이름조차 까먹어버린 그때 선본 남자들이 떠올랐다. 왜 생각이 난 건지 알 수 없는 그 지점에서 연관성을 찾으려 애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 그 중심에는 본인만이 옳고 그름 아니 맞고 틀린 지점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지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머물렀다. 폴과 로제 그리고 시몽. 삼각관계의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설의 중심부에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깊은 속뜻이 무엇인지 가늠해보기도 한다.

 실내장식가, 서른아홉 살 폴에게는 오랜 연인이자 사업가인 마흔 살의 로제가 있다. 로제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데 한 사람에게 만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바람을 피운다는 것. 폴을 사랑하지만 폴에게 전적 마음을 주지 않고 애태우고 기다리게 만드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폴은 어느 날 미국인 부인에게 실내장식 제의를 받고 찾아간다. 그곳에서 수습 변호사로 일한다는 부인의 아들이자 몽상가적인 스물다섯 살 시몽과 조우한다. 시몽은 서른아홉의 폴에게 첫눈에 반한다. 폴을 향한 로제와 시몽의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로제는 욕망에 이끌리는 자기중심적이고 기회주의자인 반면 시몽은 잘생긴 외모로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끊임없이 사랑의 말을 하는 헌신의 아이콘이다. 폴은 시몽의 태도에 신선한 호기심이 생기는 반면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젊고 순수한 청년인 시몽으로 인하여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세월을 통해 깨달은 감정의 덧없음을 안 이상 시몽의 헌신적인 사랑 앞에서 그것 또한 덧없다 여겼을지도 모른다. 시몽 앞에서 폴은 마치 청년처럼 밝고 환한 연기를 하지만 내면에선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는 게 보인다. 오랜 연인인 나쁜 남자 아이콘인 로제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폴의 마음을 눈치챈 시몽은 폴의 선택을 종용하듯 결정적 한 마디를 남긴다.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미라보다리의 청춘 그리고 에펠탑에서 본 센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전혀 다른 두 사람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 폴의 심리를 중심으로 세 남녀의 사랑과 집착, 일탈, 불안, 기쁨을 그려낸다. 스물네 살 사강이 서른아홉 살 여성의 심리를 완벽하게 묘사한다. 14세 연하남 시몽의 열정적인 구애를 받으며 바람둥이 로제로 인해 무너졌던 자존감을 회복하기도 한다. 감정이입을 돕는 치밀한 심리묘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누구나 폴의 감정선이 되어 쉽게 따라가게 만든다. 전지적 독자의 입장에는 그들 셋의 이야기가 깊은 흡인력으로 순식간에 읽히는 것에는 아마도 그 세 사람의 모습 속에 불안과 갈등 본능적인 인간성이 투영되어 그대로 드러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때 나에게는 선 본 남자와 저울질할 수밖에 없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만난 동갑내기 친구이다. 모든 외적 조건은 가장 어긋났다. 그런데 내 마음이 그에게로 쏠리는 것 같았다. ‘쏠렸다’ 아니라 ‘쏠리는 것 같았다’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는, 그런 내 마음이 나도 싫었던 까닭이다. 왜 하필 이 사람인가 하는 내적 갈등이 수차례 가슴을 휘몰아쳤었다.

  그는 순한 눈매와 오랜 시간 속에 다져진 내적 단단함이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 저녁이면(밤 12시 이후)소파같은 가구를 세척하는 세탁소 알바를 했다. 3학년 말엔 입주 과외도 했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자, 측은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앙심이 깊었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뚜렷한 약속은 없었지만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을 알았던 터, 소개팅을 할 때마다 그가 오버랩되었다. 왜 하필 이 사람이냐고 갈팡질팡하는 내 안의 갈등 끝엔 가난한 그가 늘 서 있었다.


  감성의 지배적인 영역 중 하나가 사랑의 마음인 걸까. 그 좋은 혼처 다 놓치고 하필 가난한 남자냐고 엄마가 내 등짝을 몇 대 후려쳤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장 믿었던 큰언니도 작은언니도 외면했다. 그 누구의 응원도 받지 못한 채 내 고집대로 가난한 길로 들어섰다. 나는 행복해지기로 결심했다.  


  누군가에게 빠질 수 있는 감정은 이성이라는 공식으로 판단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몽이 가진 장점을 들고 폴을 설득해본들 그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것. 종국적 고독한 삶으로 연결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감정은 로제를 선택한다.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로제가 폴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나오는 진실되지 못한 행동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폴의 슬픔에 겨운 답변. 그들 둘을 지켜보며 시몽은 폴을 설득하지만 바람둥이 로제에게로 돌아가 버리는 폴의 심리를 누가 어떻게 탓할 것인가. 마음이 그렇게 시키는 것을. 모든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할밖에. 뻔한 결과를 알면서도, 돌아가야 할 길이라는 걸 훤히 알면서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같은 것.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것을 믿는 것이다.  폴의 선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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