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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땡땡 Oct 19. 2023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절대로 뒤돌아 보지 마세요.




시간을 갖자고 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헤어짐 대신 그 한마디를 뱉는데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 말이 가지는 파급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설령 끝으로 향하는 길일지라도 내년 이맘때쯤이면 그를 묻고 잘 살아갈 것이다. 당시, 우울증까지 얻었다는 것에 어이없어 할 수도 있고, 추억이 떠오르면 옅게 웃음 지을 수도 있다. 조금만 참으면, 사랑에게 가려고 떼쓰던 마음이 언제나 그랬듯 괜찮아질 것을 안다.


그러니 한 시절 존재했다 사라질 감정에 인생을 거는 건 무모한 짓이다. 결말을 알고도 불길로 돌진하는 나방처럼 살 순 없다. 이 생의 우리는 안될 이유가 많으니까. 서로 상처를 너무 많이 줬으니까. 그 이유를 다 모른 척 하기엔 한편으로 난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이성적인 사람이니, 절대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리 없다.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알아?

나는 바위를 짊어지고 있는 거 같아. 오빠의 과거들, 내게 상처 주려고 뱉은 말들이 무겁고 버거워. 그나마 지금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어. 그런데 언젠가 그 마음이 다해 힘이 빠지는 날엔, 나는 그 속으로 무너져 내리겠지.


내가 감당하기로 해놓고, 감당하지 못하게 될 날이 올까 봐 겁나. 내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 봐.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사랑이 없어지고 현실만 남으면? 난 이 무게들과 공존해 살 수 있을까. 짓눌려 숨 쉬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그러나 당장은, 예상했던 미래가 오지 않는 일말의 가능성이 두렵다. 그 누구를 만나도 마음 한편에 당신이 빠져나간 자리가 계속 남아있다면. 당신이 내 인생의 더원이었던 거라면. 다시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평행세계의 내가 당신과 함께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한다. 저 우주 어딘가, 시공간을 초월한 곳에서의 나는 조금은 무모하고 단순했으면. 과거 따위는 괘념치 않고 함께하는 순간에 충실할 수 있을 만큼만.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 만큼만.


 



처음 만나던 날을 기억한다. 서울역 근처 레스토랑에서 초록색 티셔츠를 입은 채 걸어 들어오던 그와 까만색 원피스를 입은 채로 상대를 기다리던 나. 두 눈이 마주치던 순간. 그를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을 알았다면, 작년으로 태엽을 감아 그의 반경을 비켜가고 싶다.



그러면 우리 앞에 놓일 마음 아픈 일들이 모두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 이야기는 지워지고, 각자 등장인물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차라리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던 당신의 말처럼.



비켜갈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이 있었다. 나이, 직업, 종교까지 하나도 접점이 없었고, 애초에 그 자리엔 어쩌다 나가게 된 거였다. 그러나 애프터 후 거절의 문구를 보냈지만 이윽고 울린 벨소리엔 수신버튼을 누르고 말았고, 전화로 고백을 거절하려던 날도 찾아오겠다는 그를 세차게  만류하진 못했고 되려 시작해 버렸다. 믿기지 않는 과거를 알고 문자로 이별통보를 한 날엔,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단 음성메시지가 마음에 걸려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뒤로하고 끝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마주했다. 어쩌면 사실이 아니길 바랐겠지. 헤어지고 줄곧 이어진 그리움의 문장들을 처음엔 차단했지만, 어느 순간부턴 숫자 1을 없애며 말없이 들었고, 결국 두 달 전 재회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별 후 역설적으로 정이 들어가던 나에 반해, 그는 떼어가고 있단 걸 몰랐다. 약속 당일, 그는 나를 차단하고 당시 여자친구를 만났다. 다시 내게 상처받을까 봐 겁이 난다는 이유로.




재회 직전, 필사한 글을 보냈었다. A4용지 한 장에 가까운, 긴 호흡 중 기억에 남는 건 '절대로 뒤돌아 보지 마세요.'라는 문장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 글을 보냈던 걸까. 과거의 고통을 답습하는 미래를 어렴풋이 짐작했던 걸까. 왠지 우리는 아프게 될 것만 같았던 걸까. 이미 서서히 빠져들어간 나는, 먼저 나오긴 글렀으니 그라도 정신을 차려 끊어주길 바랐던 걸까. 그때 그를 놔줬어야 했다.




그러나 원형적인 금기를 따르고자 했던 일말의 이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돌려세웠고 그도 돌아서고 말았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가 내 반경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때 그 문장을 조금만 더 곱씹었다면 어땠을까. 모르는 척하고 싶던 어렴풋한 직감을 내뱉었다면. 아무리 마음 아파도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처럼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원 방향대로 옮겼다면. 결국 금기를 어긴 우리는 일 년 전에 갇히고 말았다. 출구를 알면서도 문을 열지 못하고 멈춰서 있다.



작년 이맘때 이별을 고했다. 처음엔 무척 후련했고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후 9개월간 이어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에게서 나를 보았다. 완벽한 관계를 망쳐버렸다는 끝없는 자책, 후회로 얼룩진 마음. 관계가 끝난 뒤에도 해방될 수 없는 수렁과 같은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모른 척하기 어려그를 꺼내주고 싶었다. 결국 나는 다시 빠져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의 과거와 밑바닥까지 받아들였듯 나 역시 상처까지도 끌어안아지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를 다 내보였던 것이 문제였다. 내 약한 부분은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무엇보다 뾰족하고 아프게.



너덜너덜해진 관계를 놓지 못하는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가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 같다. 해쳐지도록 방관하는 것 같다. 그만하고 싶다고 울면서도, 상대가 먼저 놓아버리면 편하겠다면서도 오늘도 그의 카톡 한 줄에 기분이 뜬다. 당분간 연락하지 않고 싶다던  말이 무색하게 매일 익숙한 프로필을 확인하고 내가 찍어준 사진을 보며 안도한다. 이성과 감정이 매 순간 줄다리기를 한다. 안에서 벌어지는 소모가, 양가감정이 버겁다. 나는 자신을 통합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건 피해자 코스프레인지도 모른다. 실은 나 역시 상대를 찌르고 있으면서 더 깊게 찌르고 싶어 한다. 그가 나보다 덜 불행 보여서. 덜 고통스러워 보여서. 내가 당신에게 받은 상처만큼 당신도 괴로워야 해. 내가 정신병이 올 만큼 힘든 걸 당신도 겪어야 해. 아니, 나보다 더 힘들었으면 좋겠어. 이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관계는 사랑 맞을까, 미련일까, 집착일까, 정신병일까.



다들 그만하라고 한다. 그는 나를 망치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내 얘기만을 들었을 뿐이다. 이 파국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손해는 하나도 보지 않으려 하면서 이득만 취하려는 이기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손해를 감당하지도, 깨진 독 같은 마음 한편을 채우는 이 관계를 놓지도 못한다. 당신을 내려놓으면 정말 편해질까. 어쩌면 내가 짊어진 것들은 그가 아닌 나 자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곁에 있다가 과한 누명을 쓴 사람이고. 그로 인해 짓눌러진 게 아니라, 그가 있어 그나마 숨 쉬고 있는 거라면. 그가 없는 내 삶은 어떻게 될까. 떠오를까 아니면 끝도 없이 가라앉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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