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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땡땡 Jan 20. 2020

백만 원어치의 사랑

이만큼이나 널 사랑해.



고급 쇼핑백을 건네며 그가 말했다. 여자 친구에게 얼마 이상을 써본 적이 없다고, 이만큼이나 널 사랑하고 있다고. 얼결에 손에 쥐었을 때, 무게와 상관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12개월 할부니까 그때까진 나 만나야 돼. 분명 농담이었지만 나는 사뭇 진지했다. 이 단단한 가죽이 느슨해질 때까지 우린 함께일 수 있을까?



서운함을 참는 일이 잦아진 요즘, 사랑하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고 그가 답했다. 


그럼 내가 느끼는 건 뭘까.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처음과 다른데 어째서 같다는 걸까.


얼마  버스 창밖을 내다보다 출렁이는 한강물을 따라가듯 나도 모르는  눈물이 렀다. 그날은 꽤 오래 서로 연락을 하지 않은 채 각자의 침묵을 지키던 오후였으리라. 어느샌가 무의식과 의식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고, 하루의 기분은 그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그런 그가 아니라고 하니 성가실 말을 더는 잇지 않았다.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속으로 삼킨 물음.


그럼 나는 어떻게 당신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


예쁜 배경을 보면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부산을 떨던 약간은 팔불출 같던 모습이 사라졌고, 기념일이면 어딘가로 같이 떠나자던 말이 없어졌다. 함께 있을 때 TV는 둘만의 공간에서 피어난 풋풋한 어색함을 달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여전히 나는 같은 방향을 보는 반면, 당신 혼자 휴대폰을 보면서 다른 종류의 어색함이 생겨났다. 내 일상을 궁금해하지 않는 게 서운하다 말을 꺼냈을 땐, '뻔히 다 아는 건데, 묻기 전에 그냥 먼저 말해주면 안 돼?'라는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너무 작아서 내 입으로 꺼내기 힘든 일들, 하지만 자꾸 빠져나오는 실올들. 당신의 견고한 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래서 내가 알 수 없다면 반쪽 남은 내 봉제선마저 닳아 풀어질 텐데. 우리는 사랑하고 있을까, 습관이 아닐까 하는 사포 같은 물음들에.


하지만 처음과 같다는 그의 말에  더 이상 다른 얘길 덧붙일 수 없었다. 전지전능한 한 마디에 모든 걱정과 사려는 봉제를 한 듯 땜질이 되는 듯했다.



백만 원짜리 가방, 나는  정도 되는 물건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또래의 옷장이라면 대부분 하나씩은 자리해있겠지만, 아직은 즐길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주객전도 당하지 않을 위치가   소유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보석함 속의 예물 반지처럼 아끼고 아끼다 빛을 보지 못할  같았으니.


하지만 예기치 못한 만남이 불쑥 찾아왔고, 앞선 이유에 더해  다른 이유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견고하지 못한 그의 재정상태가 떠올랐고, 이 가격에 상응하는 가치들이 환산되었기 때문이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 심각해진  얼굴을 보는 그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기에, 일단 호들갑을 떨면서 고마워했고 결국 고마워졌다.



갖고 싶은 게 뭐냐는 물음에 두 눈을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다. 피자 한판은 모의고사 날 부모님이 주시던 수고비였는데, 고소한 냄새와 쭈욱 흘러내리는 치즈는 종일 긴장했던 심신을 따끈하게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만 원짜리 지폐 두장으로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그러나 스스로 밥벌이를 시작한 뒤론, 생일마다 반복되는 질문에 선뜻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선물은 나와 어떤 물건 또는 일을 매치하는, 정성스러운 관심이 되었기에 그걸 느낄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 게다가 필요한 건 대부분 가지고 있다. 물론 여분이 있으면 좋지만 하나보단 덜 귀한 법이고 내 능력껏 사는 게 편하다.


그는 이런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백만 원을 가방과 맞바꾼 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받는 즐거움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순수하게 만드니까.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치를 포기하고 타인에게 내어주는 건 사랑의 한 방식일 거다. 더군다나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걸 보니, 누구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만큼이 대체 얼마만큼이고 환산이 가능한가에 대한 궁금증이 남는다. 고급 쇼핑백 위로 최근 부쩍 달라진 그의 행동이 오버랩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건 사랑의 징표 같은 건데 볼 때마다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걸까?


한편으론 천진한 기쁨이 사라져 가던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변했다며 상대를 책망했지만, 나 역시 그랬던 거다. 바쁜 일과 중 따로 마련한 시간과 배려에 익숙해져 무감각했는지도 모른다. 내 세포들은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방어태세를 취하는데 익숙했다. 기민하게 울리는 경고음 탓에 시야가 좁아져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서있는 사람이 불안감을 다독거린다. 널 사랑한다고.


귀하신 몸, 비닐도 떼지 않은 채 고이 모셔두었다. 저 작은 게 우리 집에서, 내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평수는 결코 작지 않다. 주얼리, 명품을 선물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일 갖고픈 건 당신의 변치 않는 사랑이다. 그 소중한 걸 가지고 있는 게 맞다면, 혼자 감춰두지 말고 느낄 수 있도록 드러냈으면 줬으면 좋겠다. 그때 나는 당신이 보고파하는 바로 그 얼굴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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