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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땡땡 Mar 08. 2020

잠시 춘면 : 무급휴가

쉬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쉬고 싶던 건 아닌데요.





"등산 다녀오셨다고요, 날이 춥다 보니 몸이 좀 으슬거리실 수도 있어요."

"오늘 완전 따뜻하던데요~?"





일요일 오후 퇴근길, 두꺼운 코트가 약간 갑갑하게 느껴지자 진료 도중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도보로 10분 남짓한 출퇴근 길에만 마스크 위 바깥공기를 접한 게 며칠째인가.



일주일에 단 이틀 황금 같은 휴일, 집에만 있으면 좀이 쑤시는 나로선 요즘 같은 때가 영 짜증 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그랬기보단 인턴 때 없는 시간을 쪼개서 어떻게든 재밌게 보내려던 습성이 아직 남아있으리라. 한 달 동안의 스트레스를 하루 안에 풀겠다고 약속을 두세 탕씩 뛰던 시절이었으니. 그때보다 쉬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늘어났으나 알차게 보내고자 하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이유야 어떻든, 원룸 한 칸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건 견디기 힘들다. 조금만 몸을 일으키고 손을 뻗으면 다 닿는 거리에 혼자라기엔 많은 짐들과 본인이 붙어있는 모양새가, 정겹기보단 한 여름 좁은 공간에 갇힌 사람들 같다.





길어진 여가시간도 한몫한다. 나 역시 자영업장에서  봉급을 받는 근로자이므로, 적어진 유동인구의 여파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불안감에 껌의 단물만 씹고 뱉는 날들이 이어졌고 한쪽 턱이 아파 올 때쯤 결국 근무요일이 조정됐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니 어쩔 수 없지. 원장님도 힘드실 거야. 스스로를 위로했으나 다음 달 월급통장에 찍힐 금액을 생각하면 힘이 빠지는 게 사실이다.



잡념 없이 시간을 보내는데 명화 칠하기를 추천받았다. 문득 시계와 눈이 마주쳤을 때 벌써? 싶긴 하다만, 작게 쓰인 숫자들을 쫓아 비슷한 색깔을 구별해 가고 있노라면 하릴없는 모니터 응시로 가뜩이나 나빠진 눈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반의 반도 못한 채 집 한편으로 밀어놓았고 안 그래도 좁은 방구석에 덩치 큰 식구 하나가 늘었다.








대학 때 종종 할머니 같다는 농담을 듣곤 했다.


겨울이면 자취방을 활활 타는 아랫목처럼 데워놓고 수면잠옷과 양말을 신은 채 전기장판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려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 별명이 어색하진 않다. 그렇기에 겨우내 날이 따뜻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정확히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야외의 햇빛을 마주하기를 고대했다. 추위를 피하고자 요 몇 달간 동면하듯 실내 생활을 했지만, 암막커튼을 걷었을 때 방안을 환히 밝히는 햇살에 설레는 마음은, 다가올 봄을 미리 본 소녀와 같았다.




여의도, 반포 한강공원에 텐트를 치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 버스킹 하는 사람 아니면 흘러가는 강물을 구경하고.

북촌, 안국역 근처의 고즈넉한 카페테라스에 앉아, 2년 전 아주 바쁘던 때 그곳에 들러 환기하듯 느꼈던 여유를 불러오고.

청계천, 인사동의 푸른 나무들이 높게 솟은 길을 이어폰을 꽂은 채 신나게 걷고.

과장 조금 보태 짐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옷 중 그날 기분에 맞는 걸 골라 뿌듯하게 집을 나서고.

결국 겨울을 지난 새싹들처럼 광합성하는 것.







요즘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좋은 점 하나는, 화장을 대충 해도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업이니 안 할 수는 없고 5분이라도 수면시간을 늘려보고자 눈썹과 입술 정도만 그려주고 집을 나서는데 퇴근 후 화장실에 들어서면 이미 반쯤 옅어져 있다. 하지만 이젠 얇은 부직포 한 장으로 가릴 수 있으니  중간중간 수정하지 않아도 되어 확실히 편하다. 그래도 주말에는, 가끔씩은, 좋아하는 옷을 입고 힘주어 꾸미고 자신감을 발걸음에 실은 채 밖에 나서고 싶은데 간밤 제대로 이루지 못한 수면으로 퀭한 눈에 채 다 말리지 못한 머리로 같은 길을 무미건조하게 걷는 날들이 이어지는 게 아쉽다.





3월엔 별것 아닌 약속을 잡게 되고 설사 아니더라도 외롭지 않다. 혼자 카페라도 가야지. 나를 침대에서 일으키고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마냥 걷게 만든다. 매년 돌아오지만 그때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처럼 설레는데 일 년 중 오래지 않을 감정을 코로나에게 뺏겨버린 게 아쉽고 분하다.






꿈뻑꿈뻑. 올 겨울은 많이 춥지 않았어도 늘 그렇듯 두꺼운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는데 날이 풀릴 무렵 얼굴까지 가리게 됐다. 호흡을 크게 할 때면 답답하기도 한데 그보다 마음 한구석이 환기가 잘 안된다.



여느 겨울보다 늘어지는, 느려지는 팔다리에 가슴에 아가미라도 달고 싶은 심정이나, 그냥 몸을 더 웅크리기로 한다. 물고기는 해일이 빠르게 지나가기만을 바라면서 납작 엎드린다.



그러다 너무 답답할 땐 이렇게 집 근처 카페에 들러 바깥으로 내뱉지 못한 날숨을 키보드 위로 쏟아내야겠다. 굳이 북촌이 아니어도, 종로가 아니어도 봄은 어디에나 오니까. 얕은 물 밑, 6평 자취방에도 햇볕은 드니까. 그러니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이 춘면이 너무 길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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