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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땡땡 Mar 23. 2020

폴댄스, 하루 만에 포기했습니다



'폴댄스 1회 체험 수강 : 만원'


휴대폰을 잡은 채 빈둥대던 오후, 꽤나 매력적인 문구에 두 눈이 빛났다. SNS 속 선망하던 지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퇴근 후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도장 찍기 하던 필라테스 학원이 휴업에 들어간 지 2주가 지나고, 몸 여러 군데에선 앓는 소리가 났다. 아침마다 올라서는 체중계는 확찐자라는 우스갯소리가 현실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그렇다고 좁은 집에서 부산을 떨 만큼 의지력이 강하진 못했고, 층간소음을 일으키는 민폐 이웃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폴댄스 전신운동이에요 코어 힘 엄청 필요해요'

'진짜 힘들어요'


관련 정보를 얻던 중 자주 보이는 댓글들을 가볍게 지나쳤다. '내가 맘만 먹으면...'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필라테스, 요가로 다져온 보통 이상의 근력, 자랑할만한 유연성, 통각에 둔한 신체 조건까지. 게다가 본인은 대부분의 일을 평균 정도는 해냈고, 그를 가능케하는 노력과 근성이 있다고 믿었다.


이 네박자를 갖추고서 적어도 포기는 안 하겠지. 초기의 난관만 지나면 무난하게 진행되리라 믿었고, 감탄을 자아내던 친구의 모습에 내 얼굴을 대입하는 장밋빛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폴을 잡아보기 전까지는.






막상 키를 훨씬 넘는 봉 앞에 서자 중력을 어떻게 거슬러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이걸 어떻게... 종전의 자신감이 한풀 꺾여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준비물 : 반팔 붙는 티, 핫팬츠 길이의 짧은 바지'


친절하게 써주신 덕에 요가 수업을 함께하던 나시와 길이 때문에 집안에서만 입던 핫팬츠를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무난한 수강생들 사이 너무 과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의상만 보면 내가 제일 실력자 같은데... 괜스레 움츠러들 때쯤, 한 여름 해변에서 볼법한 옷차림의 여성분이 등장했고 동시에 내 걱정은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신입 티를 팍팍 풍기는 내게 다가온 그녀는, 본인을 폴 강사라고 소개하곤 내 몸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렸다. 땀의 역할을 대신해 몸을 폴에 잘 달라붙게 한다고. 습기가 고루 퍼지도록 허벅지를 때리는 시늉을 하더니 무릎 안쪽 면을 폴에 댄 뒤 발을 걸어 올라섰고, 몇 가지 동작을 취하고 나도 해보라는 손짓을 보이셨다.


그리 어렵지는 않아보였던 기본 자세를 엉겁결에 따라 하는 순간, 허벅지 안쪽에 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부족한 근육을 대신해 단단치 못한 살들이 영혼 없이 차갑고 딱딱한 스틸을 감싸 안으며 마찰력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끼익-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이곳을 향해 있었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양손의 악력을 더해 간신히 매달려있는데 '팔에는 힘주는 거 아니에요. 옆으로 벌리세요.'라는 단호한 주문이 들려왔다.


하지만 입력한다고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는 법. 코어가 아닌 미간에 힘을 팍 준 채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안쓰러운 모양새는, 5초 카운트가 끝나기 무섭게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지면으로 내려앉았다. 언뜻 봐도 다리 이곳저곳이 붉어져 있었으나, 그런 것보다는 이제 내 차례는 지났다는 안도감에 한숨 돌리려는 무렵이었다.



"생각보다 잘하시네요. 다른 동작 하나 더 알려드릴게요."




이후 사십 분가량 수업이 더 이어졌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덕에 어떤 식으로 하는지는 입력이 됐으나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체험 수강생에게 특별히 더 쏟아지는 열정에 어떻게든 부응하고 싶었지만, 차가운 폴에 닿는 순간, 지레 느껴지는 화끈거림에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안 났다. 그곳에 있던 열명 못 되는 다른 수강생들이 과장 조금 보태서 고행을 감내하는 수행자들 같았다. 그들 역시 각양각색의 모습이었는데, 인고의 시간을 거친 뒤 훨훨 날고 있거나, 변태의 시기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특히 내 뒷분이 나와 비슷한 진도를 밟고 있었는데, 주저하는 나에 반해, 어떻게든 참고 올라서려는 모습이 진정 멋있어 보였다.



능숙한 포즈를 취한 한장의 사진을 선망해왔던 건, 그 뒤에 숨겨진 고난의 과정을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찌어찌 한 시간이 지나고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다. 들어설 때만 해도 우선 한 달은 해봐야지, 잘하면 새로운 취미를 찾게 될지도 몰라. 하는 작은 기대가 있었는데, 처음 폴과 닿은 순간부터 내 길이 아님을 직감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고, '고민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라는 뻔하디 뻔한 대답을 내놓은 뒤 학원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나서자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할수록 점점 익숙해지겠지만, 너무 아파 엄두가 안 날뿐더러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출근해서는 제 역할을 다하기 힘들 것 같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아프기만 한 처음을 버티기에 어릴 적만 한 근성이 없다.


대부분의 일을 평균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던 오만함이 꺾이는 기분도 나쁘진 않다. 사회에 나온 뒤로 이미 여러번 꺾여왔으니까. 'OOO 씨는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노력 여부와 크게 상관없이 재해처럼 내려오는 선고들에 비하면 타격감이 거의 없는 편이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봤음에 의의를 두기로 한다. 30이 되기 전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클리어했다.


아까만 해도 조이던 새 구두가 한결 편하게 느껴졌다. 전보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약속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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