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클럽의 음악 속도까지 미세통제하기를 원했던 우리나라 방역 정책을 보고 있으면 늘 골드버그 장치가 연상되곤 했습니다. 골드버그 장치란 겉보기에는 아주 복잡하고 거창해 보이나 하는 일은 지극히 단순한 매우 비효율적인 기계를 뜻합니다. 이 장치를 개발한 만화가 이름인 Rube Goldberg는 영영사전에 형용사로 공식 등재되어 있기도 한데, “지나치게 복잡하고 비실용적인”이라는 뜻으로 쉬운 일을 어렵게 만드는 기계, 사람, 시스템을 풍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저는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효율적인 형식주의를 보면 “K방역스럽다”는 표현이 먼저 튀어나오곤 하더군요.
우리나라 일일 확진자수가 10만 명을 넘긴 지 어느 듯 1달이 지나고 계속 우상향 중에 있습니다. 확진자 수란 예전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지금도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2년 내내 확진자수에 목숨을 걸어왔던 K방역의 업보 덕분에 대중들은 연일 아우성이고 방역당국은 갈팡질팡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야 확진자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방역의 성과는 사망자수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해 보지만, 그동안 K방역의 목표가 확진자 수 최소화였음을 기억한다면 그리 설득력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 해명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먼저 지난 2년 동안의 방역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가 선행되었어야 했습니다. 사망자수가 중요한데 왜 일일 사망자수 1,2명에 확진자수가 천명이 넘는다고 거리두기 4단계를 실시하면서 수많은 자영업자들을 생존의 위기로 내몰았나요? 사망자수가 중요한데 왜 처음부터 치명률 0%에 수렴했던 아이들이 2년 동안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 했나요? 사망자수가 중요한데 왜 감염과 전파를 막지 못하는 백신을 두고 백신패스 제도까지 도입했어야 했나요? 사망자수가 중요한데 왜 확진자수를 줄이겠다고 특정 집단을 돌아가면서 마녀사냥을 했었나요?
최근 올렸던 제 브런치 글에 달린 한 댓글에서 저의 주장과 K방역이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놀라운 주장을 했던 분이 계셨습니다. 사용하는 단어나 논리 전개를 보았을 때 우리나라 방역정책에 깊이 관여하고 계신 분으로 짐작되었는데, K방역을 주도해왔던 전문가들이 가진 현재의 인식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서 참으로 암담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논문 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듯한 그 분은 유행초기부터 PCR검사를 제한적으로 했던 초고령국 일본과 무증상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한국의 코비드 19 누적 사망률과 초과사망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논문없이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조차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과거를 미화하는 일은 개인차원에서도 국가차원에서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개인이 하는 과거 미화야 이해도 되고 사는데 도움도 되는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국가차원에서 발생하는 과거 미화 혹은 왜곡은 매우 위험합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자판에서 K자를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K방역에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저의 생각과 K방역이 결국 동일하다는 주장을 할 정도로 이미 지난 2년 동안 벌어진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그분들의 기억을 누군가는 생생하게 되살려 드릴 필요가 있을 겁니다.
오미크론 변이 덕분에 사회가 집단최면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습니다. 백신 접종률 1등, 마스크 착용률 1등, 온갖 방역 수칙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증가하는 확진자수에 인간이 바이러스를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에서는 의미 없는 확진자 수 헤아리기와 대책없는 격리를 계속하는 K방역스러운 일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군요. 비용이 단 한 푼 들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지만, 엄청난 세금을 사용해가면서 벌이는 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한심합니다. 일찍부터 건강한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사회 기능도 유지하고 집단면역도 서서히 높여가야만 했던 지난 2년, 오로지 <빛나는 K방역을 위하여> 무증상조차 허락되지 않는 에볼라급 감염병으로 둔갑시켜 버렸던 우리 사회의 집단 광기가 남긴 상처가 너무 깊지 않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