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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덕희 Sep 08. 2023

前질병청장의 근황에 대한 기사를 읽고..

2022년 2학기, 저희 학교 의예과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제를 하나 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과목은 의대 커리큘럼 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교수 재량에 따라 상당히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는 토론식 수업으로 <비판적 사고력 함양>이 수업 목표 중 하나였죠. 아래는 당시 과제 내용입니다. 



<제목> 내가 질병청장이라면? 


<배경> 2025년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매우 유사한 성격을 가진 새로운 호흡기계 바이러스 감염병 팬데믹이 선언되었다. 이번 팬데믹 경험을 바탕으로 본인은 어떤 정책을 펼칠 것인지 논리적으로 기술하시오. 이때 동선추적, 마스크 착용, 거리 두기, 백신 접종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포함하시오. 



며칠 후 과제 보고서를 하나씩 읽어가면서 한 동안 망연자실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맡은 분반의 학생수는 약 40명 정도였는데, 학생 전원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선추적,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백신접종을 더 철저하게,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각종 아이디어들을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2년 가을은 이미 하루 수십만 명 확진자가 나오던 오미크론 유행이 지나가고 난 뒤였습니다. 따라서 저는 자신들이 경험했던 그 방역 정책들의 무의미함, 백신 정책에 대한 의구심, 더 나아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에 대한 대응 그 자체에 문제의식을 가진 학생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애초 계획은 보고서를 보고 기존 정책을 <옹호하는 측> vs. <비판하는 측>으로 나눈 후 난상토론을 시켜보겠다는 것이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버렸죠. 


현재 전국적으로 의예과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각 고등학교의 최상위급 학생들입니다. 코로나사태 이후부터 이 학생들의 생기부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하나 있는데, 바로 본인이 교내 방역활동에 얼마나 열성적으로 참여했는가? 에 대한 기록입니다. 일전에 나온 제 책의 서평에서 한 고등학교 교사가 <질병청의 理想現實이 되는 곳이 학교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 질병청이 지시하는 모든 것을 100% 해냈다는 학교에서 전교 1, 2등을 다투었던 이 학생들에게는 국가 정책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절대善이라는 관점이 이미 체화되어 버린 듯했습니다. 


최근 K방역을 이끌었던 前질병청장께서 모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아마 서울 의대에 입학한 학생들도 저희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과 이번 사태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감염병에 대한 현 패러다임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한 채, 지난 3년 질병청에서 주도한 방역 및 백신정책에 완벽하게 세뇌된 이 학생들이 비판적 복기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그냥 의사가 되어 버린다면 이번과 같은 일은 반드시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짐작한 바와 같이 근황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아직도  前질병청장을 구국의 영웅으로 부르면서 K방역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믿는 국민들이 적지 않은 듯하군요. 하지만 이 분은 한국의 방역 및 백신 정책과 관련된 많은 사안들에 대하여 국민들 앞에서 해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한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자 함이 아니라, 미래에 이번과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다만 현재 사회 분위기상 이런 일이 조만간 가능할 것 같지는 않으니, 모교로 돌아가신 前질병청장께서 최소한 스스로 복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나 이에 도움이 될까 하여, 오늘 제 책 <K방역은 왜 독이 든 성배가 되었나>를 우편으로 한번 보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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