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EBS <하나뿐인 지구>라는 국내 최장수 환경 다큐 프로그램에서 <모유 잔혹사>라는 잔혹하기 짝이 없는 제목을 부제로 단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유에서 광범위하게 검출되는 각종 환경오염물질에 대한 정보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바람에 원래 그 프로그램에서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간데없고 분유회사의 협찬을 받아서 만든 프로그램이란 오명을 쓴 채 제작진의 사과문과 한국 유니세프의 입장문 발표로 가까스로 마무리된 비운의 다큐죠.
어쩌다 보니 제가 그 프로그램에 자문교수로 출연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룰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지라 쏙 빠져버려 아주 난감한 입장이 되어 버렸어요. 방송이 나간 후 세상이 아주 시끄러워지고 나서야 저도 시청자 게시판에 <이 시대, 모유를 먹이는 방법>이라는 장문의 글을 올렸었죠. 오해 마시라... 는 취지로..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최근 다이어트 방법으로 <저탄고지>를 선택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 같아서입니다. 심지어는 임산부들조차 <저탄고지>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2016년 <지방의 누명>이란 다큐가 방송된 후 <저탄고지>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됩니다. 그 어떤 방법보다 살 빼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이 경험담을 통하여 공유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지방, 특히 동물성 지방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해왔었기 때문에 <지방의 누명>에 공감하는 부분이 매우 많은 연구자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장기간"의 <저탄고지>가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몇몇 전문가 단체에서 영양소 불균형이라는 전통 영양학의 관점에서 <저탄고지>를 비판하는 반대 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그런 시시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칼로리와 개별 영양소만을 끊임없이 지엽적으로 따져왔던 현대 영양학은 인체 건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제가 장기간의 <저탄고지>에 대하여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현대사회의 동물성 식품의 지방 안에 광범위하게 축적된 수많은 환경오염물질들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로 <모유 잔혹사>에서 나온 모유 속에서 광범위하게 검출되는 환경오염물질들과 동일합니다. 풀 먹이면서 키운 가축이라고 해서 이러한 환경오염물질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며 개별 화학물질의 관점에서 허용기준 이하라서 안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중에 기회 있으면 자세히 설명드리겠지만 현대사회에서 환경오염물질로 인한 질병들은 대부분 허용기준 이하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러한 환경오염물질들은 지용성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먹이사슬을 통하여 생명체의 지방조직에 기하급수적으로 농축됩니다. 이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바로 인간이 존재하죠. 그리고 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유일한 음식이 바로 모유입니다. 다이어트 방법으로 <저탄고지>를 선택하고 그 이후에도 <저탄고지>를 기본으로 생활한 젊은 여성들이 후에 임신을 하고 아기를 가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본인의 지방조직에 가득 축적된 이러한 환경오염물질들이 태아와 아기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유를 만들어내는 가슴은 지방으로 가득 차 있고 모유는 그 자체로 지방 함량이 매우 높은 음식입니다. 비극적 이게도 모유는 엄마의 지용성 화학물질을 체외로 배출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임신 초기는 태아의 각종 장기들이 형성되는 매우 민감한 시기인데요 이때 대부분 임산부들은 입덧을 경험하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우리가 먹지 못할 때 지방은 주요 칼로리원으로 사용되는데 이때 지방조직에서 지방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축적되어있던 환경오염물질들이 같이 혈중으로 흘러나옵니다. 일단 많이 혈중으로 흘러나오면 그만큼 태아에게 많이 간다고 보면 됩니다.
지방조직 내에 축적된 환경오염물질들은 태아와 영유아의 신경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종류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 외에도 면역계, 호르몬계, 대사계 등에 총체적인 영향을 줍니다. <저탄고지>를 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문제가 존재합니다만 <저탄고지>를 장기간 하게 되면 태아와 영유아에게 전달되는 그 절대량이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의 지방조직에 축적되는 이러한 환경오염물질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지 않고 단지 체중을 조절하는데 효과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저탄고지>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탄>, 즉 탄수화물 제한은 호메시스를 활성화시키는 핵심적인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에 다양한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면 상당히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비만으로 인한 대사성 질환이나 호르몬성 질환을 가진 환자들에게는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그러나 장래에 임신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 본인의 일상적인 식생활로 <저탄고지>를 선택하는 것은 말리고 싶습니다. 특히 <저탄고지>를 하고 있는 임산부들이 있다면 바로 중지하기를 권합니다. 임신하면 아기한테 영향을 준다고 카페인, 니코틴, 알코올 온갖 것 다 가리면서 <저탄고지>를 본인의 기본 식생활로 선택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입니다.
어떻게 살든 이미 이러한 환경오염물질을 피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아픈 아이들이, 아픈 어른들이 늘어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위한 다른 대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기가 더 쉽다는 이유로 임신을 계획하는 젊은 여성들이 <저탄고지>를 일상의 다이어트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은 전형적인 소탐대실의 사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