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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Jan 05. 2020

조선왕조실록. 의리. 경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11.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전권을 구매하여 읽고 있다. 중종 실록까지 읽었는데 실록을 기반으로 한 터라 정치사가 대부분이라 매 장이 흥미진진하다. 특히 계속 읽다 보니 경험과 의리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된다.


박시백씨도 본문에 적어놨지만 조선의 왕들은 경험에 의거한 정치를 많이 하는 모습을 보인다. 세상 누가 안그러겠냐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형제간의 도륙 끝에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자식들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갖은 애를 썼고, 동시에 자신이 이복동생에게 밀렸던 경험 때문에 적장자 원칙을 확고하게 세우고자 했다. 그 결과로 비록 양녕대군이 폐세자되고 삼남인 충녕대군이 세종이 되었지만 왕자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이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냈기 때문에 자식들도 으레 자신처럼 그럴 것이라 생각하여 자식들 간 위계를 세우는 데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고, 자신이 재주가 많음에도 형 양녕대군에게 밀려 장래를 꿈꾸지 못한 것에 대한 경험때문에 차남인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등에게도 능력을 발휘할 길을 열어준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세조(수양대군)의 쿠데타라는 참혹한 결과로 나타난다. 한가지 원칙이라는 것이 맞아 떨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뛰어난 점이라면, 왕들이 유년기에 혹은 왕이 되기 전에 겪었던 경험들이 그들의 정치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인데 나는 이 이야기들이 꼭 직업정치인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인생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인상적인 이야기는 의(義)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자면 의리란 결국 시류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비판을 담당하는 대간들에게 간신이라고 비판받았지만 나중에 보니 그것이 자신의 양심에 따른 행동이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인물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수없이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하나는 연산군 때의 노사신이라는 인물이다. 단종때 급제하고 세조,성종,연산까지 4대를 벼슬을 지낸 베테랑이다. 연산군은 사실 초반까지는 큰 문제가 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성종때부터 대간의 활동이 급진화되서 연산군때까지 이어지는 기조가 있었는데, 대간이 연산군과 정부활동에 비판을 가하면 노사신이 항상 연산군의 편을 들어 당시의 대간들은 노사신은 늙은 간신이라고 허구한날 씹었다고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림들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다. 입장 다르다고 씹어대고, 문장 잘쓰고 경학 모른다고 씹어대고...)


그러나 무오사화 때 여러 사람들이 도륙 위기에 처하자, 사림들이 그렇게 씹어댔던 노사신은 사안을 축소시켜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게 하도록 노력했고, 연산군에게 대간을 싹 없애야 한다는 아첨꾼들의 주장에는 '청론하는 선비가 조정에 마땅히 있어야 한다'라고 화를 내는 등, 정작 사림들을 많이 구해준 건 그들이 씹어댔던 노사신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인물은 중종대의 남곤이라는 인물이다. 조광조의 세력이 너무 커짐을 걱정하여 결국 기묘사화를 준비,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조광조의 처벌을 낮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아마 부끄러움을 느껴서였다는 평이 중론) 그 개인도 뇌물을 멀리하고, 차림도 수수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청백리였다고 한다.


남곤은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얼마 안지나서 죽게 되는데, 마지막 유언은 '내가 허명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내가 쓴 글들은 모두 없애고, 내 시신은 비단으로 염습하지 말며, 평생 올바르지 못했으니 비석도 세우지 마라'라고 말한 것이었다고 한다. 노사신같이 현장에서 양심을 따른 이는 아니었지만 조선시대에 사후의 우대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였음을 생각해본다면 그 또한 결국 자신의 양심에 따랐던 이인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인물은 결국 세조 때의 신숙주일 것이다. 재주가 하늘을 찌르고 정치가,행정가로서도 훌륭한 일이었지만, 자신을 아꼈던 세종과 문종이 사랑한 단종을 폐위시키는데에 앞장섰고, 평생 세조에게 제대로 반대해본적도 없는 인물이니 이런 사람을 의리있고 본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리있는 인물이란 결국 시대가 어떻건 간에 자신의 일관된 마음에 충실한 것인데, 그런 사람이 되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박시백,<조선왕조실록> 전권 20권. 역대 왕들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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