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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Jan 05. 2020

시대의 드라마

91년도의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14.06.03



MBC <해피타임>에서 해주는 91년작 <이별의 시작>이라는 드라마 요약본을 봤다. 아는 분도 계실 지 모르겠다. 해정(김희애)과 경수(김동현)라는 부부의 이야기인데, 시집살이가 힘들었던 부부가 이혼을 하고, 각자 끌리는 사람을 만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다 뿌리치고 재결합 한다는 내용이다. 지금 보면 흔하디 흔해서 방영조차 안 될 이야기다. 

근데 흥미로운 것은 이 드라마에 지금 기준에서 봤을때 필수적인 자극적 갈등이 그다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갈등이라는 것도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90년대 초반에는 충분히 자극적인 소재였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보면 거의 다른 세상 드라마처럼 느껴질 수준이다.

갈등의 주축 중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시집살이 에피소드부터 보자. 이때도 시어머니를 하고 있는 김용림씨의 악랄함이란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김용림씨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걸레 한개만 세탁기로 빤다고 궁시렁거리는 수준과 '내조못하면 남편도 성공 못한다'라고 신경 긁는 게 이 극에서 나오는 김용림의 최대 갈굼치다. 그나마도 나중에는 반성을 한다! 이혼한 며느리에게 '부부란 억겁의 인연이다'라고 타이르다가도, 그래도 내가 너무 내 아들만 감싸고 돌아서 미안했다..라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는 김용림씨라니. 화면에 김용림 떠서 얼마나 긴장을 했는데.

주인공 남녀관계의 설정도 재밌다. 질투는 조금 있지만 1g수준이고, 음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남편 경수가 이혼 후 수희라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 마음이 심란해진 해정은 수희를 만나 대화를 시도한다. 경수에 대한 마음을 물어보는 해정에게 수희는 '이혼한 부부는 남남처럼 살아야 하는게 아닐까요'라고 당차게 말하고, 해정은 꽁해가지고 경수한테 '여자보는 눈이 그거밖에 안되요?'라고 전화하는 게 이 드라마에서 남녀가 보여주는 가장 추잡한 짓 중 하나다(...) 요즘 같았으면 일단 수희와 해정의 음모결투가 극 절반을 차지하고도 남았을 것을.

재결합 하는 단계를 보자. 이 단계 쯤 접어들 때는 일단 누구 하나 쯤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음모들이 격파되며 주인공들이 옛 감정을 회복하는 것이 지금의 공식이다. <이별의 시작>은 정말 소박한 재결합을 보여준다. 해정과의 재결합에 실패하고, 수희에게도 충실할 수 없어 이별을 택한 경수는 집에서 혼자 몸살이 나 끙끙댄다. 경수가 연락이 안돼 걱정한 해정은 경수를 찾아갔다가 이 답답한 남자가 혼자 끙끙거리는 걸 발견하고 '왜 맨날 나만 뭐 모르는 사람 만드냐!'라고 붙들고 엉엉 울다가 마음이 동해 재결합을 결심한다(...) 이런 소박함과 정직함이라니. 

사람들이 모나고 악한 구석이 없고 다 각자의 캐릭터성으로 인해 갈등할 수밖에 없는 설정이 흥미롭다. 해정은 커리어 우먼에 대한 욕구가 있어 전근대적 시집살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경수는 일이 너무 바쁘고 전형적으로 눈치없는 남자라(우리 엄마는 안그래~) 가정을 신경쓰지 못한다. 수희는 그저 젊고 이쁘고 당차지만 아직 복잡한 심리를 이해할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풀 스토리를 보지 못해서 세세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흔하디 흔한 이혼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는 때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지난 시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복고주의자들이 착각하듯이 지난 90년대가 착했던 시기기에 이런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이런 드라마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드라마와 뉴스에 펼쳐지는 격렬한 갈등을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시대이자, 그런 갈등(혹은 범죄)들이 가정사라는 이름 아래 숨겨지고 검열된 시기였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지금이라고 엄청난 진보를 달성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 20세기는 가정폭력이 수시로 숨겨지고, 여아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낙태를 하는 일들이 만연했던 시대가 아니었었나. 사회에 만연했던 전근대적인 태도들이 이런 착한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던 배경이 되었던 것일 수도 있음을 고려해본다면, 어떤 면에서는 지금이 훨씬 나은 시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은 <이별의 시작>에 젊은 광고모델 역할이자 주인공 경수와 사랑에 빠지는 수희 역할을 맡은 배우 음정희씨. 은퇴하신지 꽤 되었다고 하는데, 당차고 시원시원한 매력이 있는 배우였던 것 같다. 드라마에서도 매력적으로 나온다. 경수가 나쁜 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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