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을 보다 (2015)
언젠가는 봐야겠다고 20대 중반에 생각했던 <송환>을 일 때문에 보았다.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사상전향을 하지 않아 혹독한 고문과 긴 수감에 시달린 비전향 장기수들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왔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남이 다 하는 일(전향)을 안한다고 누가 알아줄 거냐.그럴때 내 말은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나 혼자만이라도 알아준다. 자기조차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러워서 어찌 사니"(신현칠/정치공작원 25년 복역)
"이런 짓을 해가지고(폭력적인 전향 강요)오랫동안 형성된 정신상태를 바꾼다고 하는 것들은..남보다 훨씬 뒤떨어진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남한테 뒤떨어진 사람들한테 나는 굴복할 수 없죠'
이공순(정치공작원/33년 복역)
지금 시대에 가장 흥한 것은 '남이 알아주는 것(도덕/인기)'이고 가장 쇠한 것은 '내가 알아주는 것'(윤리/양심)일 것이다. '남이 욕망이 나의 욕망'이라는 자세가 가장 흥한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말이 인간의 사회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던가, 무언가를 팔기 위한 목적에 관한 조언이라면 받아들일 만 하다. 그러나 삶의 모든 국면들에 대하여 '남이 알아주는 것'이 중요한 이 시대에는, <송환>에 나오는 장기수들의 인터뷰들이 경이롭다기보다 낯설다.
'자기조차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럽다' 라니. 이 말 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생경하고 한심한 말은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믿기가 어려운 시대에 내 자신이 만족하면 됐다는 말은 어느 때보다도 멍청하고 한심한 소리로 여겨진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패배의 상징, 신포도의 상징이 되어 비웃음을 산다. 굳건해지고자 하는 윤리적인 이들을 공격하는 가장 편한 말은 '네가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 '그래가지고 먹고 살겠냐'라는 말들이다.
<송환>이 한번도 공개되지 않다가 2014년에 개봉했다면, 우리는 위에 적어놓은 저 인터뷰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북한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이 고루한 것으로, 혹은 기형적인 것으로 비춰지고 비웃음을 사는 이 때에 그런 거에 사소한 자신의 양심따위를 걸어 30년을 허비한 인생이라는 반응이 무척 많을 것이다.
무척이나 생경하게도,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20년전 남한에는 자신의 양심을 지킨 이들을 보며 힘을 얻었다는 장기수 후원회원들의 인터뷰도 나오고,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조직들도 나온다.(물론 운동권 조직일 것이고, 그때라고 해서 한심하다는 반응이 없었을 리는 없겠지만) 20년의 시간을 건너 지금 이 시대에 장기수라는 존재를 다시 데려다 놓으면. 그들은 이념과 양심을 지킨 굳건한 상징이 될까, 아니면 그들이 어떤 변혁을 꿈꿨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묻힌 채 30년을 허비하여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돌봐줘야 하는 불우한 노인이 될까. 후자가 가까울 것이다.
20년전의 후원회원은 장기수들에게 자신이 양심을 지킬 이유를 발견했을 것이고, 지금의 후원회원이라면 자신이 착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를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20년전의 홍보 팜플렛에는 '시대의 양심을 지킵시다'라고 나오고, 지금의 홍보 팜플렛이라면 '불우한 장기수에게 따뜻한 손길을' 이라고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냉소적일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양심에 따르는 윤리적인 일보다, 쉽고 편한 도덕적인 일들을 더 많이 하는 세상에 산다. 한 인간의 양심이 지향하는 바가 아무리 한심해보일지라도-그것이 김일성, 혹은스파게티 괴물에 대한 것이건- 일관되게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지킨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결국 우리 자신의 양심을 대하는 자세일텐데. 그런 이들이 적어도 비웃음 사지 않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라는 말은 돈을 받는 일에 대해서는 많이 쓰이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 쓰이는 경우엔 없다. 그러기엔 너무 우릴 둘러싼 세상이 복잡하고 험난해졌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너무나 영악해졌다. 도덕적 인간 되기야 너무나 쉽지만, 윤리적인 인간이 되기란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