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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Feb 10. 2020

20년 동안 자기가 한 일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진다면

진중권이 울었다는 기사를 보고. 

 80년대 생 중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 그 중에서도 여러 계기로 진보정치 (혹은 좌파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 중 진중권 선생이나 박노자 선생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있을까? 물론 홍세화 선생이나 김규항 선생도 빼놓을 수 없겠지. 홍세화의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전해주는 이국의 똘레랑스는 충격적이었지만 너무 선생님 같았다면,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진짜 쇼킹 그 자체였고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나 <폭력과 상스러움>은 보고 있으면 웃음보가 터지고 신이 나는 책이었다. 그렇게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에 그들을 만나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라며 신선한 충격 속에 생각의 틀을 잡기 시작한 이들이 정말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진보신당 해체 이후의 그들의 행적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실망하고 어떤 이들은 쓰게 웃기도 하고 혹은 여전히 열광하고 있겠지. 그러나 그들이 끼친 영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특히 진중권이란 사람은 정말로 여러가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어찌됐건 남 눈치 안보고, 소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은 소리를 센스있게 퍼붓는 사람이니까. 물론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의 화법과 행적들이 한국사회에 좋은 영향만 끼쳤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나는 지금의 어떤 '일침' '조롱'의 기조를 형성하는 데 진중권의 역할이 꽤 컸다고 생각한다. 그가 뭘 의도했거나 잘못해서가 아니다. 그가 온라인 세계가 형성되는 초창기부터 너무 천재적으로 그런 것들을 잘 활용해왔기 때문이다. 좋건 싫건, 좌파건 우파건, 일베건 TERF건 자신의 말을 통해, 센스있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자 하는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 진중권 키드의 면모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 고 노회찬 의원도 이 자장 속에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시민들에게 그는 항상 든든한 오피니언 리더였고, 한국사회가 종종 보이는 발작에 가까운 대세감에 항상 찬물을 끼얹으며 생각을 끌어내는 선생이기도 했다. 그가 정작 생각하는 구체적인 정치의 방법론이 명확한 적이 없었고, 어떤 논의를 정말로 해결을 강구하는 생산적 방안까지 깊게 끌고나간 바가 없으나, 어쨌든 그는 당적을 가지고 그것을 내세우며 활동하는 데 저어함이 없었으며, 이슈를 제기하는 데 거리낀 적이 없었다.


 유시민 따위와 다르게 일관되게 지향하는 바가 명확했고, 야당일때 다르고 여당일때 다른 간사한 자들과 명확하게 선을 그어왔으며,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구세대의 적들에게 사용해왔던 사람이니까. 얼마나 많이 속시원하고 웃고 신나고 그랬었나.


 그 시간들을 통해 그에게 배운 것들은 근데 센스있게 상대를 조롱하는 법 이런 게 아니라....태도와 주장의 옳고 그름은 분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상대가 혐오와 증오로서 그릇된 주장을 내뱉을 때 우리는 유머를 잃지 말자는 것. 그리고 특정인을 숭배하거나, 특정인의 가치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거나, 적과 아군에게 공통의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는 이들을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 한다는 것. 진중권은 항상 그렇게 살려고 해왔던 사람이고 요즘 하는 말들도 좀 나간 면은 있지만 어쨌든 예전 그의 행적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일관된 사람도 드물다.


 근데 강연 도중 운다고 하니 (그것도 뭐 어디 대중강연도 아니고 안철수 신당 발기인 강연.....) 내가 괜히 다 맘이 짠하고 쓰리고 그렇다. 그가 장소를 잘못 골라서 강연했다는 비판도 있고, 그런 말들도 필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걸 탓하고 싶진 않다. 진중권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쓴게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안티조선 운동에서 활약했던것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세상이 딱히 바뀐게 없다고 생각하면, 나 같아도 울 것이다. 맘이 괜히 안좋다. 그냥 루비랑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는데. 참....시대란 게 왜 이럴까. 물론 시간이 흐르면 결국 또 진중권이 맞았다는 게 증명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그런 쪽에 천부적인 직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좋은 의미다) 그래서 사회에 그가 필요한 부분이 분명 있지만, 그치만 이제는 그냥 세상사 따위 관심을 접고, 평화롭게 사는 걸 보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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