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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Mar 03. 2020

물건을 팔때 '그로스해킹'은 어디까지 의미가 있을까.

그로스해킹, 북극성지표, 퍼포먼스...정말 응용 가능할까?

 나의 첫 업무는 뮤지컬 마케팅이었고, 그 다음은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마케팅 / 부가사업 기획 / 제작지원-관리 등을 주로 해왔다. 이렇게 무형의 상품을 파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손에 잡히는 것을 동경하게 된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아 손에 잡히는 실물 상품을 파는 일이나, 결과를 측정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관심이 컸다. 다행히 운이 닿아 이커머스 회사로 직장을 옮기게 됐고, 그 과정에서 그로스해킹/ 퍼포먼스 마케팅 등 개념을 알게 됐다. 이 개념들에 큰 매력을 느낀 건 당연지사. 

 
다만, 이 개념들을 보며 계속해서 느낀 이물감이 몇가지 있었다. 

첫번째는 그로스해킹이나 퍼포먼스의 방법론들이 인간을 조건반사의 존재로만 가정한다는 인상.
두번째는 이 개념들이 아주 특수한 환경에서만 작동한다는 인상이다. 

첫번째부터 이야기하자면.  페이스북이나 구글에 대해 비판자들이 하는 주장들을 이야기 할 수 있겠다. 거대 기업들이 사람들의 인내를 끊임없는 A/B테스트를 통해 고갈시킨다는 비판 같은 것들. 넷플릭스의 <소셜 딜레마> 같은 다큐멘터리에서도 주장하는 바들 말이다. 

 물론 나는 그로스해킹의 실무자들이 인간을 얕게 본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방법론이 근본에 내포하고 있는 어떤 기본 세계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사실 실무자 개개인의 세계관이나 인성, 심지어 사업의 목표와도 큰 연관이 없다. 

 무엇보다. 이런 인간관 또한 하나의 개념이니만큼, 배경이 분명 있다. 온라인 환경이 고도화 되면서 소비결정까지 이뤄지는 시간이 단축됐고 등등...세상은 더 빨라지고, 더 정신 없어졌다. 이런 압축 속에서 사람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케팅은 환경에 반응해서 그러한 방법론을 들고 나온 것일 뿐.


마음을 훔친다기 보다는 인내력을 훔쳤다고 봐야겠지.


 다만 신기하게도 세상이라는 게 참 복잡하고 깊어서, 협의의 의미에서의 그로스해킹. 즉 수십 수백번의 A/B테스트, 버튼 색 바꾸기, 배치 바꾸기, 콘텐츠 재배열 등이 근본적인 해결법이 아니라는 것은 많이 탄로나고 있다. 마케팅 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상품의 레벨에서도 즉각적인 어필에 방점을 맞춘 SNS 상품들이 잘 만들어진 양품을 이기는 일은 점점 더 요원해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비자들도 빠르게 A/B 테스트를 통한 최적화를 이뤄가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SNS 광고를 통해 히트친 제품들을 생각해보면 초창기의 SNS 히트템만큼 Before & After가 확실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제품이 별로 없다. 오히려 퀄리티 있게 잘 뽑고, 그것을 잘 표현해내는 제품들이 SNS에서도 점점 강세다. 

 때문에 마케터들도 단순히 런칭 이후의 과정만을 책임지는 게 아니라 (당연히) 상품 기획단계에서부터의 여러 사고를 요구받게 된다. 물론 어떤 이들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로스해킹이다'라고 할 것이지만. 사실 이 정도 수준까지 용어의 정의가 광범위해지면, 그러한 새로운 용어의 출현은 그저 기만이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글을 진행하다보니 개념이 좀 혼재되어있는데. 그로스해킹이 하나의 세계관이고 퍼포먼스 마케팅은 하나의 방식이라고 정리를 해보자. 그렇다면 '진짜 그로스해킹'을 하기 위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자,  '북극성 지표'나 '브랜딩+퍼포먼스'의 개념. 더 나아가서는 OKR 등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요즘 더 자주 보인다. 북극성 지표란 쉽게 말해서 매출/트래픽 등의 단순한 결과지표가 아니라, 핵심가치를 정확하게 반영한 지표...라는 건데.  나는 북극성 지표를 생각할때 위에서 말한 이물감의 두번째 정체를 생각해 보게 된다. 작게는 A/B테스트부터 넓게는 북극성 지표. 그리고 그로스해킹까지, 이 방법론들 자체가 타깃의 액션을 퍼널별로 측정할 수 있고 비교적 빨리 각 단계와 상품을 개선할 수 있는 온라인 환경에서 나타났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온라인을 벗어나면, 이 개념들은 계속 어그러지고 재정의를 요구한다. 심지어 북극성 지표까지 가면, 기업의 '비전'이나 잘 만든 KPI라는 개념과 구분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그게 정말 좋은 개념들이라고 할 수 있나? 이 개념들이 '실제 손에 잡히는 물건'을 파는 실무자들에게 어디까지 유효한가? 를 요즘 생각해보게 된다



 초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맞춰서. 궁극의 그로스해킹 진행이나, 북극성 지표의 설정을 위해서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리해봐야 한다. 그러나 실제 손에 잡히는 물건을 파는 기업은 추적의 어느 한 구간에서 막히게 된다. 와우모먼트는 무엇이지? 상세페이지를 보고 혹할때? 택배박스를 열어봤을때? 혹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체류시간이 늘어나는 것인가.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나? 버즈량? 리뷰의 정성평가? 다이렉트 트래픽? 짧은 경험상 이 대부분이 좀...맞을때도 있었고 아닐때도 있었다. 적어도 내 생각엔 물건을 파는 마케터에겐 지표 설정을 위한 정보가 정말 많이 부족하다. 또 그 점이 물건을 파는 마케팅을 재밌게 만드는 거지만...
 
 이런 저런 이유들로 물건을 파는 마케터에게 이러한 디지털 기반의 개념들이란 아직 반쪽자리 방법론이라는 게 요즘의 내 생각이다. 더군다나 상품의 시기마다도 다르다. 브랜드가 잘 구축되지 않은 상품이 최종지표를 나이키나 닌텐도처럼 세팅할 수는 없을 테다. 일단은 매출을 늘려야 한다. 트래픽을 늘리는 건 의미가 없다. 가게에 왔어도 물건을 사야 할 게 아닌가? 

 물론 많은 액션들이 디지털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이런 개념들을 어느 정도 잘 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정말 고심을 많이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건을 파는 회사라면 어플리케이션 시장과는 다른 환경 속에 있는데, 그 환경에서 나온 방법론을 차용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색하다. 때문에 재정의해야 하고, 어쩔 때는 거절해야 한다. 


 이론이란 항상 주창자가 처했던 환경, 혹은 문제의식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실행의 근거나 알리바이로서 개념이 창안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을 고도화 시켜 정제한 게 이론이기 때문. 그렇기에 정치이론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 부터 한 시기를 풍미하는 마케팅 방법론까지. 어찌됐건 그 '론'들이 태어난 배경을 돌이켜 보며 내 삶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실제 세계는 샘플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고, 최소규모를 달성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물건은 공장에서 생산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인지는 시시각각 변하는 디지털 환경속에서 빠르게 바뀌는데 제품의 개선은 느리게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사용 경험은 깊다. 사용자가 택배로 물건을 받아보고 박스를 까는 순간. 상품을 실제 생활에서 다양한 변수 속에서 손에 쥐고 사용하는 순간. 내가 이 제품에 대한 리뷰를 쓸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 등등. 이 부분은 소프트웨어, 어플리케이션 등 온라인 내에서의 무형상품에도 분명 존재하는 순간들이지만, 물건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 가능하고 추론할 수 있다. 물론 거기서 오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들이 있을 것이다. 마케팅은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상품이 제작되는 방식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실물 상품의 세계란 느리고, 깊으며 중간중간 끊어져 있다. 


 때문에 물건을 파는 영역에서는 옛날 마케팅에서 확립했던 방법론들 - 간접적인 지표와 추리들로 결과를 추측해내는 리서치 방법들이 여전히 유효하고,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나가는 게 필요하다. 모든 것이 측정 가능해야 한다는 환상을 어느 정도는 깨고, 추론과 직접 측정한 지표를 섞어서 결과를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재구성 해야 한다는 얘기다.

 물건 파는 사업만 그런게 아닐 테다. 내 경험상 콘텐츠를 파는 사업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물건을 파는 것 - 소프트웨어를 파는 것 - 콘텐츠를 파는 것은 완전 다른 배경에서 움직인다. 여전히 콘텐츠는 노동집약적이고 많은 자원이 들어가고, 수정이 불가능하며, 생산이 느리다.

 그렇다면 지속적인 개선과 다양한 테스트를 통해 성공률을 높이는 그로스해킹의 방법론들을 적용하는 것이 마케팅을 잘하는 것인가. 오히려 생산의 제약조건에서 오는 리스크를 줄이고 이슈라이징을 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홍보용 콘텐츠 개발과 이벤트, 기자간담회 등을 진행하고 초반의 이슈화를 진행.  타깃들이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첫날의 시청자, 첫날의 관객이 되도록 하는 게 지상 과제가 될 수도 있다. 그 다음은 제작의 영역에 넘기고 말이다. 이때의 마케팅 세계관은 '그로스해커'가 바라보는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영역을 꿰뚫을 수 있는 마케팅의 초끈이론을 찾는 게 아니라, 어느 영역에 가더라도 빠르게 환경을 파악하고 방법론을 응용/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며, 내 주변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요즘 내 가장 큰 업무상 고민이기도 하다. 그리고 추가로, 나는 요 몇년간 계속 화두가 됐던 '브랜딩'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물감을 느끼고 있다. 특정 조건에서 가능했던 방식이 지나치게 보편성을 획득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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