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자살 시도 소식을 듣고 원주에 가는 길은 진짜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지금 생각하니 나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듯 하다. 어떤 면에서는 계속 불안해했기 때문에 막상 아빠의 자살 사건이 터지고 나자 "올 게 왔구나"하는 마음이 되버린 면도 있다. 원주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가니 엄마가 대기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가서 인기척을 내니, 엄마는 보자마자 나를 안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빠를 못지켰어. 내가 아빠 못지켜서 미안해 동훈아. 그 말을 들으니 뭔가 평온하던 마음이 다 깨졌다. 내려올때의 평온이 태풍의 눈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 왜 아빠를 엄마가 지켜. 아빠가 실수한거지. 아빠가 잘못한거야...등의 말을 하며 엄마를 달랬다. 하루종일 시달렸을 엄마를 일단 쉬게 해주는 게 필요할 듯 해 일단 병원 인근 숙소를 잡아 짐을 풀고 엄마에게 사건의 개요를 들었다.
추석 이후에 아빠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불면은 계속됐다. 환청이나 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수군거린다고 했고. 밤중에 자꾸 찾아온다고 했다. 정상적인 사고판단이 어려우니 당연히 표정도 안좋고, 일도 못하니 계속 멍하니 앉아만 있었는데 엄마는 아빠의 상태가 마치 귀신이 들린 것 같았다고 했다.
아빠가 자꾸 아빠가 아닌 것 처럼 굴어서 당신 자꾸 이러면 난 전주(엄마 친정)로 갈꺼야. 라고 하니 째려보면서 언제 나갈 거냐고 묻질 않나. 계속 엄마한테 말도 안되는 이유로 신경질을 부리고 화를 내질 않나. 이런 상태가 며칠이 반복되자 엄마는 식구들과 상의해서 아빠의 정신병원 입원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때 즈음 몇년간 연락이 끊긴, 보건소 의사를 하고 있는 작은 아버지와 연락이 되기 시작해 엄마는 작은아버지와도 계속 입원 논의를 했는데, 작은아버지도 10년 전, 갑작스레 아들이 죽었던 충격으로부터 겨우 스스로를 구해낸 상태여서 엄마에게 이런저런 조언들을 많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의 상태는 계속 걷잡을 수가 없고. 결국 엄마가 견디다 못해 아빠를 입원시켜야겠다고 말하니 아빠는 가지고 있던 졸피뎀을 다 먹고는 식칼을 들고 집 옆 계곡으로 가서 자살하겠다고 난리를 친 것이다. 이를 발견한 엄마와 몸싸움을 한바탕 하고, 아빠를 겨우 제압해서 끌고 올라왔더니 그때부터 약기운이 돌아서 의식을 놓았다고 했다. 산골에서 일어난 일이라 닥터헬기를 통해 원주로 아빠를 이송해왔고...그래서 결론은, 다행히 몸은 다친 곳이 없고 현재 약 때문에 의식만 없으며 며칠 후면 깨어날 테니 너무 걱정 말라고.
듣고 나니 어찌나 황망하고 어이가 없던지! 엄마는 더 그럴 것이다. 우리 집 계곡은 깊이는 2m 정도로 그리 높진 않지만 돌도 많고 험해서 미끄러지거나 하면 크게 다치기 쉬운 곳이다. 아무리 정신을 놓았기로서니 그런 위험한 짓으로 엄마까지 다칠 뻔 했다고 생각하니 가뜩이나 아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더 화로 쌓여갔다. 엄마는 멍하니 앉아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아빠를 감당할 수 있냐고 괴로워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몇가지 없었다. 엄마는 할만큼 했다. 아빠의 업이다. 몫이다. 아빠 잘못이다. 그렇게 엄마를 안아드리고 달랬다. 아빠를 위해 엄마는 정말 모든 걸 맞춰왔는데...이제 좀 인생이 편해지나 했더니 아빠 스스로 쌓은 업 때문에 결국 이 지경이 되었고, 아무리 병 때문이라지만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만든 아빠 생각에 속에서 화가 터져나와 엄마와 함께 아빠를 몇시간 내내 철저히 욕하고 씹은 뒤 잠을 청했다.
작은엄마는 산에서 아빠에게 귀신이 붙었다고 했다. (무속 쪽 일을 하시는 분이다) 나는 당연히 그런 걸 믿지 않지만, 엄마는 진지하게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 스스로도 자신이 귀신 들린거 같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에게 당신은 그럼 귀신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고 귀신 편을 들 거냐고. 귀신이 있다면 나랑 같이 물리치면 되고 내가 이길거라고 했다고 했다. 내심 그런 패기에 또 다시 엄마를 내가 존경했던 이유를 생각해보게 됐다.
나는 엄마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대단한 만큼 이 사람에게는 너무 과분하고, 또 그만큼 가여운 사람이 됐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때는 그게 엄마의 선택이기 때문에 엄마를 가엽게 여기지 않으려고 했다.
엄마 스스로 아빠를 돌보는 삶을 선택했고 거기서 가치를 찾는다면 굳이 자식이 그 삶을 타자화하면서 측은해하기보다는 엄마를 돕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엄마의 인생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또 한편으로는, 아빠 쪽 집안의 안좋은 결말들을 생각해봤다. 둘째 큰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자살했다. 첫째 큰아버지는 심근경색으로 급사했다. 사촌은 알 수 없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나머지 자식들도 우울증과 이런저런 병들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될까. 쓸데없는 고민으로 밤새 뒤척이다 아침 일찍 아빠를 보러 병원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