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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May 03. 2020

몇가지 쓸데없는 생각들.

청나라. 준가르. 역사. 독서. 마케팅.

1.< 중국의 서진>을 다 읽었다.

 5월을 넘기고 싶지 않았는데 연휴 동안 기운을 내서 겨우 다 읽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역사책의 기준이 몇가지 있다. 하나는 책을 읽은 후 우리가 처한 현재의 환경,상식이 원래부터 자연스럽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며 그저 특정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일시적인 결과물일 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좁은 기준이나 틀을 벗어나서 좀 더 넓은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사실이 수많은 상호작용과 우연을 통해 일어났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요 근래 읽었던 역사책들은 다 성공적이었다. 유럽의 근대 팽창 시기, 유럽과 다른 세계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주고받았는지를 다루는 에릭 울프의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불평등의 개혁은 대규모의 빈곤/전쟁과 떼어놓을 수 없음을 보여줬던 발터 샤이델의 <불평등의 역사>, 역사서적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미국이 가지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전통을 미국 건국시점으로부터의 사회/종교/경제적 과정을 통해 되짚는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 같은 책들은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매우 즐거운 책들이다 (물론 읽는 과정이 즐겁지만은 않다) 피터 C.퍼듀의 <중국의 서진>도 이러한 좋은 역사책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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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청나라가 몽골 유목민족 최후의 제국 준가르를 정복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기존의 학설들은 준가르와의 경합을 단순히 청나라 변방의 난으로 다루거나, 중국의 전통적인 유목-농경간 갈등으로 다뤄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청나라의 준가르 정복이 러시아-티베트-유럽 일부까지도 엮인 유라시아 대륙의 복잡한 그레이트 게임이며, 준가르라는 유목국가가 그 게임의 와중에 매우 적극적인 플레이어로 활동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또, 이를 통해 청의 준가르 정복이 동아시아 내에서 국한된 경쟁이 아니라 서구의 팽창에 비교될만한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이자 이를 통해서 청이 국가 정체성을 정립하고 국가부흥을 끌어냈다는 점. 그렇게 확보한 서북 지역의 땅을 청이 어떻게 관리했으며 그 지역에 흘러든 다민족들로 인해서 사회에 어떤 역동성과 불안,기회가 만들어졌는지. 그리하여 결국 청의 준가르 정복을 통한 성공의 경험이 나중에 청을 어떻게 궁지로 몰아넣었는지를 보여준다. 틀이 크고, 새롭고, 복잡하다.
 
 그런 과정들을 보면서 나는 개인과 조직에 대해서도 청이라는 제국이 했던 과정들을 적용해볼 수 있다는 단조로운 생각을 했다. 강희-옹정-건륭의 3대조에 걸쳐서 준가르를 정복하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역사적 사건이란 개인의 심성과 변덕, 구조적 요인의 결합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준가르 지역까지 원정을 나가기 위해 수반되는 자원에 대한 부담, 준가르 지도자들의 변덕, 다른 행위자인 러시아 / 티벳의 입장에 청나라 황제들의 개인적 배경과 목표들이 얽히고 섥혀 있고, 목표는 계속해서 실패하거나 재설정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청은 준가르를 정복했고, 이후에 그 모든 것이 천명에 따른 결과인 것처럼, 황제의 원대한 계략에 의한 것처럼 포장하여 대대손손 남긴다. 그러나 준가르 정복과 서북 지역의 경영에 대한 성공적 경험을 영국과의 무역에도 적용하려던 것이 이후 청의 발목을 잡는다. 왜냐면 영국은 준가르가 아니었으며, 준가르 정복을 진행할때의 청의 상황과, 그 당시의 상황은 전혀 다른 국면이었으니까. 

 이것이 비단 제국의 역사에 관한 것만 그러하겠는가? 개인과 조직도 마찬가지겠지. 이런 원대한 책을 너무 자기계발 적으로 해석하기가 좀 민망하지만, 청나라의 성공과 이후의 포장, 그리고 실패는 똑같이 조직과 개인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공식은 곧 쇠퇴하고 성공사례는 지나치게 포장된다. 과거의 경험에 기반하여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하는 건 지금 세상에서는 더더욱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요즘 '공식'을 찾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냥 그 순간의 대응만이 의미가 있는 게 아닌지 자꾸 고민하게 된다.

  고민은 잠깐 접어두고, 이런 책을 읽고 있으면 나는 역시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지금 당장 쓸 수 없는 지식이어도 좋다. 이런 사실들을 알고 생각해보고 정리해보고,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게는 꽤 큰 즐거움이다. 이 책은 <춘추전국이야기>로 유명한 공원국 작가가 번역했는데, 생각난 김에 알라딘에 검색해보니 완간 당시에는 ebook으로 나와있지 않던 <춘추전국이야기>가 ebook으로 출판되어있다. 기쁜 마음에 주문했다. 위의 준가르 이야기가 좀 더 궁금한 분이라면 아래 링크한 역자의 칼럼을 참조.



2. 마케터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인가


 마케팅의 역할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시장을 이해하는 것. 팔리는 구조를 만드는 것 등등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말들이 내게는 그저 '마케터는 결국 사업기획 / 사업을 해야해' 라는 결론으로 들린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실무자 입장에서 필요한 역할이란 그런 큰 그림에서의 마케팅적 사고가 아니다. 그런 말들은 사실 많은 실무적 문제들을 모른척 하는 이야기다. 내가 몸 담은 조직 내에서 마케터는 어떤 대체불가능한 업무를 진행하는가?가 실무자에게 더 중요할테다. 근데 그런 게 있나? 아래 생각들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들이며, 사실 실제 세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일수도, 지극히 편협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이를 테면 피디는 영상을 기획하고 제작한다. 기획자는 상품의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구현한다. 이 업무들은 사실 상당히 독립적이고, 차별성이 있으며, 호환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마케터는 무엇인가? 더 잘 팔리는 법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근데 내가 볼 때 그것은 마케터가 아니라, 뭔가를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하는 기업조직에 있는 한 다른 직군도 충분히 수행하는 역할이다. 결국 광고채널을 (그것이 유료이건 무료이건) 얼마나 잘 기획하고 운영하는가가 1차적으로는 마케터의 역할일테다. 


 그런데 사실 많은 마케터들이 느끼고, 또 부정하고 싶은 것 처럼. 물건과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이 타깃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획/제작한다면 마케터가 해야 할 일들은 상당히 줄어든다. 이미 모든 고려가 다 끝난 제품에서 마케터가 순수하게 자신의 역할로서 해낼 게 과연 몇개나 있는가? 즉, 마케팅의 원재료 단계는 마케터에게 속해있지 않다. 기획이 능력이 좋다는 전제 하에 시장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잘 팔리는 법을 가장 잘 아는 건 기획자이겠는가, 마케터이겠는가? 100% 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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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수한 기획에는 마케터가 그닥 큰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갈수록 기획부터 마케팅까지 요구되는 리소스가 줄어들고 있는 이 환경에서, 한 직군으로서 마케터가 자신의 전문성을 광고시스템의 이해와 운영에 국한시켜놓으면 앞으로는 더더욱 설 자리가 없다. 상품의 설계당시부터 이미 시장성에 대한 고려가 끝났다면 과연 마케터의 역할이란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내가 생각할때 뛰어난 마케터란 천만관객 영화 마케터가 아니라, 예측 80만 관객 짜리를 100만 200만으로 만드는 마케터이다. 


  마케터에게 보통 주어지는 업무란 생산자,기획자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나 그들의 더 중요한 일 때문에 할 시간이 없는 업무들을 위임한 경우가 많다. 세상에 왜 그리도 마케팅/광고 대행사가 많고 왜 그리 사짜가 많겠는가? 본질적으로 '위임받은 일을 잘 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때문에 세상 제일 답답한 마케터란, 인하우스 직군이 에이전시 관리만 하면서 자신이 뭔가 마케팅을 잘 하거나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는 이들. 혹은 시종일관 마케팅 행위가 정말로 마케터만 가능한 독립된 무엇인가처럼 구는 경우일 것이다.
 물론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고 업무를 조율하고 전체 프로세스를 고민해보고...뭐 이런 일들을 마케터들이 좀 더 많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건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창의력이나, 정말 본질적인 능력이라기 보다는 그냥 언제든 대체 가능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기업이 힘들 때 마케팅 부서부터 줄이는 이유, 정말로 전설적인 마케터라고 불린 이들이 결국 다 사업가나 기획자가 되고, 그게 아니면 카피를 기깔나게 쓰는 광고인이거나 이 업계의 구루 (혹은 약장사)가 된 이유가 다 이러한 면들에서 기인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카피를 쓰고, 광고를 관리하고, 계획을 짤 때마다 생각한다. 아이고 이거는 우리 기획자나 피디가 나보다 100배는 잘 할텐데.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하지만 나는 상품을 만들 수도, 영상을 연출할 수도 없다. 그들이 가능한 것을 위임받아 행하는 것. 이게 실무자로서 마케터의 가장 본질적인 업무라는 생각을 나는 다시 하게 됐다. 그래서 마케터는 몇가지 업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업무를 손을 대야 하는 것이며, 소위 짜치는 일들을 다 해낼 수 있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결과도 나오지 않는다. 조직이란 많은 이들이 함께 장단점을 보완해가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곳이니까. 

 하지만 기능적으로 본질적인 업무와 그것이 아닌 업무는 분명 존재한다. 나는 마케팅을 하는 사람들이 이 현실을 다들 너무 외면하거나, 포장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물론 그것을 직시하는 순간 찾아오는 건 '도대체 나는 조직에서 필요한 사람인가'와 같은 우울함이지만.

 본질적으로 내 것이 없는 일. 물론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에게 직군이 무엇이건 '내 것'은 없지만..ㅎㅎ 그게 나쁘거나 소극적이거나 싫다고 느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걸 해야겠지? 다만 나는 아직 다른 답은 잘 찾지 못했다. 다만 좀 더 이 직군이 뜬구름 잡거나 큰 그림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더 실무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차근차근 일을 해낼 수 있는 직군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업무의 본질이 '위임받은 일의 수행'일지라도 그것에 요구되는 요건들과 목표가 분명 있는 법이다. 그리고 좀 더 근본적으로는 내 업무의 전문성이나 독립성은 정말 일을 잘 해내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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