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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Jan 13. 2017

솔직함이 아니라 연기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자아연출의 사회학] 을 읽고 쓰다.

  진실은 상투적인 표현 속에 있다. '인생은 한편의 연극이다'라는 말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는 사회생활에 지쳤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떠났을 때 이 비유를 떠올리곤 한다. 생각해보면 대체로 별로 좋은 의미에서 쓰이는 말은 아니다. 더군다나 '솔직한게 최고다'라는 요즘 시대정신을 생각해보면 연기,연극은 우리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추방해야 하는 단어 같다. 그런데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자아연출의 사회학>에 따르면 우리 삶에서 연기를 떼어놓을 수는 없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아와 사회를 형성하며,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들은 일상을 무대로 하는 연기를 한다. 이것이 <자아연출의 사회학>의 전제이다.


  연극에는 무대와, 대기실과, 관객, 그리고 배우와 스텝이 있다. 우리의 일상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장소와 분위기, 인물들이 존재한다. 책을 빌자면 '타인과 주고받는 인상이 사회적 삶을 표현하는 구성 요소의 원천'이고 '우리 사회는 대체로 인물을 연기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자아를 어느 정도 동일시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연극적 행동은 숙명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회사의 공식적인 업무 공간에서는 좋은 동료이자 일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로서 행동한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느정도는 친구들 사이에서 합의된 또래집단의 룰이나 역할기대를 충족시키는 선에서 행동하고자 한다. 극단적인 연극적 성격장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는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모두 다 실감하고 있다.  


  그러나 상사가 없거나(방학이다!) 동료끼리의 회식(오늘 속풀이 해야지?)에서는 업무공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며, 친한 관계라 할 지라도 다른 또래집단에서는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간관계에서의 이별,다툼 등으로 급하게 역할을 수정하거나, 사실 기존에 해왔던 연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진실을 흐리는 등의 다양한 대응을 해나가야 한다. 또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직에서 요구되는 룰을 지키고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묻어두거나, 더이상 동의할 수 없는 행태나 관계 때문에 무대를 파투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연기자이며, 타인의 연기를 지켜보는 관객이다. <자아 연출의 사회학>은 이 모든 경우의 수를 세밀하게 카테고리화 해서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인생은 한편의 연극이다'라는 말을 관찰과 추상화를 통해 과학적으로 증명한 책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의 삶이 정말로 수십편의 짧은 연극을 해나가며 또 관람하는 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우리가 한탄하듯, 그런데 어빙 고프먼에게는 이런 고민은 별로 본질적인 물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자아 연출의 사회학>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의견은 '진정한 자아'를 찾는 우리의 여정과는 정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사회관계를 떠난 자아란 없다. 진짜 자아란 우리가 하는 연기 속에서만 실현된다.


  물론 그 연기는 본질적인 나 자신과는 거리가 먼 모습일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이란 뭘까? 우리는 '진정한 나 자신'과 욕구와 충동을 헷갈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는 지나치게 욕구와 충동을 억제한 사회 관습이 빚어낸 결과일테고 이성과 본능의 조화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이들이 정말 훌륭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우리와 같이 희노애락을 느끼는 평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감각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줄 때. 자신의 충동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윤리적 가치를 위해 일관된 행동을 보이는 걸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들에게서 고귀한 인간, 우리가 한번 따라해볼만한 자아를 발견한다. 마냥 솔직하기만 한 인간이란 누구에게도 귀감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를 정말로 인간답게 만드는 건 결국 갈고 닦인 연기가 아닐까. 우리가 어떠한 연기를 끝까지 일관성있게 해낼 수 있다면 그 연기는 결국 우리의 자아가 된다.


  중요한 건 내가 보여주는 자아의 모습이 진짜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윤리적 의미를 갖는지, 그런 연기를 우리가 해나갈 의향이 있는가이다. 시민으로서의 예의와 에티켓 마저 '연기'라 치부하고 솔직함만을 지고의 가치로 치는 요즘 세상에서 오히려 우리가 정말 되찾아야 하는 건 제대로 연기할 만한 롤모델, 혹은 사회관계의 모델은 아닐까? 책의 구절을 빌리자면, 이 시대의 비극은 '정해진 시간에는 어김없이 완벽하게 똑같은 공연을 한다고 믿을 수 있는 일종의 정신의 관료화'가 기만적 행위로 느껴진다는 점에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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