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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Sep 04. 2020

활자 중독자들의 윤리

상투적 표현을 탓할 게 아니다.

 애서가의 입장에서, 나는 요 몇년간 가장 충격 받았던 책으로 <모든 순간이 너였다>를 꼽는다. 이 책은 하태완이라는 작가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을 모아서 낸 책이고, 2018년에 무려 50만부를 팔아치웠다. 그리고 이 책 이후로 이제 SNS 에세이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 우리는 서점에 가면 말도 안되는 수준의 온갖 에세이를 볼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수준이라는 건 인쇄할만한 가치가 없을 정도로 상투적이고 평이한 책이라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의 표현들이다. 


음....


 이런 이야기를 하며 툴툴대니 출판 쪽에서 일하는 친구가 뼈아픈 지적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것은 책을 쓰고 내는 사람의 문제라기 보다는 독자층의 이슈라는 것이다.



 사람들, 특히 1020에서 다양한 표현의 글을 접해볼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이제는 책 읽는 사람들 기준에서 '너무 상투적인데?' 싶은 표현조차도 감성 넘치고 개성 있는 표현이 되었다는 게 친구의 지적이었다. 예를 들면 그냥 블록버스터 무비만 보고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공식을 약간만 틀어도 인생의 띵작이 되는 것 처럼.


 물론 책을 소비하는 방식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목적이 아니라 SNS에서 좋았던 포스팅을 실물로 소장하거나 그저 책을 구매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끼는 활동으로 바뀌었다는 점도 있겠지만(이건 애서가들도 똑같이 하는 일이고) 근본적으로는 점점 우리가 접하는 표현이 빈약해지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이 가진 표현력도 낮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SNS 에세이의 인기를 바라봐야 하지 않냐는 게 친구의 비평이었다. 동의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디지털 네이티브가 성인이 되고, 유튜브/인스타그램이 세상을 잡아먹고 있는 시대에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글을 활용하는 표현에 대한 강력한 욕구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하태완 류의 글이건, 아니면 좀 더 잘 쓰여진 글이건 간에 에세이류가 항상 높은 판매량을 차지하는 것. 글쓰기 강좌와 책이 항상 인기리에 팔리고 인스타그램에 글을 쓰는 이들의 수요가 꾸준히 있다는 것, 중요한 순간에 사람들이 '입장문' '사과문'을 쓴다는 것은 텍스트 퇴보의 시대에도 표현의 한 방식으로 글쓰기가 유효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 원인은 사회의 메인스트림이 여전히 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 결국 글을 다루는 것에 능수능란한 이들이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권력자들 중 글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지 못하는 이들은 드물다. 주요 결정사항들은 21세기인 지금도 글로 만들어진 문서를 통해 만들어지고 유통된다. 글을 잘 다룬다고 해서 권력에 진입할 수는 없지만, 권력에 진입한 사람 중 글을 잘 다루지 못하는 이들은 없다. (글을 잘 다룬다는 게 문재를 갖췄다는 뜻은 아니다) 권력의 끄트머리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수많은 텍스트의 바다(시험)을 거쳐야 한다.


 또, 글은 영상과 다르게 '나 혼자 쓸 수 있는' 표현 양식이기 때문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아무리 상투적이고 쉬운 글일지라도, 우리는 글을 쓸 때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며 글을 쓰게 된다. 내 속에 갈무리해놨던 어떤 생각,느낌들을 내가 가진 단어의 범주 내에서 어떻게든 표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문장이 완성되야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런 1인의 고독한 느낌이 주는 완결성도 있겠지.




이런 상황에서, 글을 좋아하는 이들이 지금의 에세이나 글쓰기 기술이 넘쳐나는 현상에 대해서 취해야 할 태도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상투성들이 돈을 번다니'라는 통탄은, 꽤 구조맹적인 발상이 아닌가.


얼마 전 부터 읽기 시작한 김성우,엄기호의 대담을 엮은<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에서 다루는 문제도 같은 맥락에 있다. 멀티미디어의 시대에 문자 위주의 리터러시 능력 기준이 은폐하는 권력관계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친구의 지적처럼, 상투적 표현이 범람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그 상투적 표현들을 소비하는 근본적 이유가 있고, 우리는 그 이유가 정말 해결해야 될 문제인지, 아니면 인정해야 할 문제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표현이 빈약해져 가는 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아니 애시당초 빈약해진 게 맞는가. 표현이란 결국 말과 글을 기준으로만 하는 이야기다. 하태완의 에세이를 좋아하면서도, 감도높은 영화를 볼 줄 아는 사람은 가능한가? 글은 유치하더라도 영상에서 잘 표현하거나, 잘 듣는 이라면 그의 표현과 감정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글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 메인스트림의 능력 중 하나라면, 구조를 보자고 하는 이들이 그 능력을 신봉하는 것은 어디까지 '옳은가'.


지금 우리가 표현이 얕아진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그저 이제는 너무 많은 이들이 쓸 수 있게 되서 느끼는 것일 뿐 아닐까? 그리고 문자를 좋아하는 자들은 이 상황을 환영해야 하는 건 아닐까.  문자의 날들이 점점 저물어가고 굳이 문자로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말이다.




"리터러시 자원이 많이 있다는 것은 타인을 깔볼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다른 면에서 보자면, 다리를 놓아야 하는 책무가 생기는 것입니다...나는 60층짜리니까 거기서 내려다보는 게 아니고, 상대방으로 가는 리터러시라는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다리를 놓아야 하는, 철학이나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상호주관성을 구축할 수 있는 윤리적인 책무가 생기는 거예요. 더 노력하고, 더 이해하려고 애써야 하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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