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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Oct 03. 2020

세상에서 제일 세련된 광고물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의 취미를 20년째 하고 있는 사람이라 취미에 관한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몸을 써서 연습하는 취미를 좋아한다. 그래서 <족구왕> 같은 영화를 보면 너무 가슴이 뛰고, 얼마 전 소개한 <다시 피아노>나 이번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이하 달리기)같은 책을 보면 마음이 너무 풍성해지고 의욕이 막 솟아난다.


  <달리기...>는 제목 그대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주제로 쓴 에세이를 묶은 작품이다. 다시 피아노를 살때 같은 주제의 책을 연달아 읽고 싶어서 같이 구매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하루키는 소설가의 주요 역량으로 체력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달리기를 몇십년째 꾸준히 해온 아마추어 러너이기도 하다. 마라톤도 이미 여러차례 완주했고 트라이애슬론에 100km 울트라 마라톤까지 완주했다니 과연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운동에 관한 이야기들이 간간히 나오는데, 이 책은 달리기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춰 쓰여진 글이라 더 몰입도가 있다. 러닝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본 하루키라는 사람의 직업관, 세계관,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 내내 펼쳐지는 달리기와 인생에 대한 그의 입장이 너무 매력적이고, 또 요 근래 내가 어렴풋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여 뭔가 편안한 마음도 든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들.


 가령 그것이 실제로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낡은 냄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이 이렇게 변화해가는 것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젊었을 대보다는 변화에 시간이 걸린다. 젊었을 때 한 달 반이면 가능했던 일이 3개월이 걸리게 된다. 운동량과 달성된 일의 효율도 눈에 띄게 나빠진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체념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으로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의 원칙이며, 그 효율의 좋고 나쁨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닌 것이다


나에게는 요요가 그렇다.


 굳이 시니컬하게 굴자면, 이 책의 모든 표현, 하루키의 삶의 모습은 우리의 실제 삶과는 거리가 멀다. 8월을 하와이에서 보낼 수 있는 수입이 있고, 하기 싫은 것은 구태여 많이 하지 않았도 되는 명성을 지닌 월드클래스 소설가. 그런 사람의 달리기에 대한 감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얻을 수 있을까.


 하루키에 대한 묘사 중 내 머릿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묘사는 김연수 작가가 하루키의 양복에 대해서 했던 묘사다. 자신은 연수입을 들여도 살 수 없는 양복을 사는 작가라고 했던가.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좋아하는 건 어쩌면 화려한 광고물에 혹한 상태와 비슷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도 하루키의 글은 (좋은 의미에서) 고도의 광고물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가 포착한 저 깨달음들은 여유로운 환경에서 얻어졌다는 점을 빼면 사실 우리가 항상 어렴풋이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알게 될테다.  그리고 내가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일지라도 좋은 문장을 통해 표현되는 게 얼마나 우리 인생의 시야를 좋게 하는지도.


 <달리기..>는 쉽게 닿을 수 없는 풍요로운 환경과 세련된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을, 읽은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통찰로 써낸다. 거기서 오는 약간의 착각, 혹은 일말의 진실도 있다. 어쩌면 진실된 경험이란, 통찰이란 내가 사는 환경과는 무관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 점이 아마 또 하루키의 글을 사람들이 좋아해온 이유이겠지 싶고, 이 취향의 세계에서 하루키가 장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겠지. 책을 읽고 나면 괜히 미즈노의 운동화를, 올드 팝송과 락음악을, LP판을 찾아보게 되는 그런 세계.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나도 굴복하게 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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