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진나라 왕 영공의 총애를 받는 대신 조순. 그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힌 대장군 도안고는 조순에게 누명을 씌워 조씨 집안의 9족을 멸한다. 조씨 집안의 문객이었던 의사 정영은 예기치 못하게 조씨집안의 마지막 핏줄, 조씨 고아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이를 마지못해 약속한다.
도안고는 조씨고아를 찾아내기 위해 온 나라의 아이를 다 죽이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조씨집안에 신세를 진 수많은 사람들이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이도 모자라 결국 정영의 아이가 조씨집안의 아이 대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정영과 조씨집안의 벗, 공손저구가 정영의 아이를 조씨고아로 위장하여 도안고에게 바친 것이다. 충격에 휩싸인 정영의 아내도 세상을 등진다.
그렇게 도안고의 마음을 산 정영은 조씨고아를 도안고의 대자로 들이고, 그 집에서 20년간 함께 살며 복수의 칼을 간다. 복수는 끝내 성공하나 정영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젊음도, 복수의 쾌감도, 찬사도 없다. 대의명분을 지켰다는 뿌듯함은 찾을 길이 없는데,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은 생생하다. 극이 마무리되며 다음과 같은 외침이 울려 퍼진다.
인생은 꼭두각시 놀이. 이 이야기를 분별삼아 앞으로 잘 분별하시기를.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를.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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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조씨고아 : 복수의 씨앗>을 보고 나면 이 마지막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격정이 가라앉고 나면 이 말이 참으로 허무하고 냉소적인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극의 마지막 말이 의미값을 가지려면 정영이 적극적으로 욕심을 내며 상황에 개입한 인물이어야 하건만, 그는 정말 세상 불쌍한 사람이다. 그가 지킨 정의도 의리도, 저지른 죄 (아이를 내어준 것)도 모두 어느 하나 자신의 적극적 의지로 행한 것이 없다.
그는 그저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자신을 돌봐준 사람을 찾아갔다가 일에 휩쓸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에게는 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극을 보고 난 사람들은 계속 되묻게 된다. 정영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까?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을 수가 있을까? 그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의리라는 무거운 책임이 쌓이고 결국 자신의 아이를 죽도록 내모는 죄까지 저지른다. 이는 꼭 정영 뿐만이 아니라 극 중 모든 인물들이 마찬가지다. 적극성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우환에 '휘말린다'
이 극 속에서 휘말리지 않는 존재는 딱 둘 뿐이다. 하나는 진나라 왕(영공). 그는 도안고의 모함을 받아들여 조씨집안의 9족을 멸하라 지시한 사람이며, 나중에 조씨고아의 도안고에 대한 복수를 허가한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극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관찰자인 묵자. 그는 인물들의 퇴장을 배웅하고, 마지막에 극을 정리하며 '좋게만 살아가라'고 권하는 이다. 그가 휘말리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 이 극의 상황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높은 이가 되거나, 모든 것과의 관계를 끊거나. 그 둘만이 우환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다 정영과 같은 처지에 빠져있다. 재난에 휩쓸리지 않을 방도가 없다. 우환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리고 우환을 피하거나 해결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 (파렴치해지거나, 손해를 보거나) 이런 사람들이 대다수인 세상에서 탈속이니 유우자적이니 초탈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허탈한 말인지. 조씨고아를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될 수밖에. 인생은 결국 이런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고, 묵자를 보며 초탈을 꿈꿔보지만 다시 또 굴레속에 빠져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