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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Nov 21. 2021

결국은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1. 정권 말기, 불미스러운 일로 문체부 장관이 해임된다. 레임덕 시기까지 겹쳐 똥줄이 타던 청와대는 반전 카드로 보수정당 초선 출신의 여성 정치인 이정은을 장관으로 임명한다. 80년대의 김연아급 스포츠 스타이자 사격 장교 출신. 얼레벌레 보수정당에서 국회의원을 달았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던 인물.


그러나 그가 예나 지금이나 일관된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체육계의 성폭력/폭력 사건 해결! 그래서 이정은은 장관으로 부임하며 이러한 사건을 해결하는 '체수처'설치를 준비한다. 그러던 중, 이정은의 남편인 평론가 김성남('나꼼수랑 친하고 진중권이랑 호형호제 하며 유시민 같이 되고싶어 안달인')이 납치를 당하게 되는데.....


2. 예고편으로 정덕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초반 스토리라인. 이 드라마 덕에 주말 내내 엄청 즐거웠다. 드라마는 정말 놀랍도록 잘 만들어졌고, 웃기고, 멋지다. 웨이브로 방영한다는 게 아쉬울 정도의 퀄리티다. 인물들이 다 하나하나 살아있고, 명확한 역할이 있다. 장관 남편의 납치라는 메인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 정치의 웃픈 모습들을 코믹하게 잘 담아낸 것도 좋았다. 그 패러디의 수준이 그냥 SNL 코리아가 하는 수준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 하에 이뤄진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흐름을 잘 담아내고 있다는 드라마라는 인상도 명확하다. ("정치 물고 뜯고 하면서 뇌섹남 타이틀 달던 한량들 시대는 끝났어" "쉽게 뭘 얻는 여자는 없거든, 이 나라엔")


3. 그런데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매력은 사실 <스토브리그>나 <미생>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전에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수준의 정치 패러디는 물론 훌륭하지만, 그것만이라면 이렇게까지 즐겁진 않았을 것 같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인 이정은과, 결코 밉지 않은 라이벌인 보수정당 4선의원 차정원은 부정할 수 없는 작품의 메인이지만. 실제 문제를 해결하며 우리 마음을 흔드는 순간은 문체부 내의 공보담당 신원희와 조정실장 최수종 두 사람에게서 나온다.


4. 두 사람은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일을 어떻게든 수습하느라 바쁘다. 시종일관 코믹한 극의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조직에 내던져진 사람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서로 툭툭 내뱉으며 정리하는데. 그 말들이 울림이 크다. 뭐 예를 들면 이런 말들. 좀 미생 st 긴 하지만.


"오늘 예산 정리하면서 깨달았는데, 나는 정치를 하고 있더라고. 줄타는 그런 정치 말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정치 말이야"

"내게는 대본이 주어진 적 없지만, 알아서 제 몫을 해야겠지"

"(상사가) 믿는다는 말 만큼 고문이 없다. 하지만 장관의 고문이라면 감당하는 수 밖에"


5. 다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들은 장관에 비하면 실무자지만 조직에서는 관리자라는 것. 그에 비하면 정말 실무자라 할 만한, 극 중 나타나는 90년생들은 거의 관리가 불가능한 조커 수준으로 그려진다. 물론 거기서 표출되는 긍정적 효과들이 있지만 어쩌면 이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 그리고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란 사회생활을 몇년 이상 해보고 안정기에 접어든 사람들이라는 반증일지도. 젊은 꼰대들의 드라마일 수도 있단 얘기다.


6. 그렇다 해도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현실에서나 드라마에서나 '할 수밖에 없기에 잘 해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세상에서 칭송하는 일잘러들은 사실 정해져 있다. 좋아하니까 잘하는 사람. 잘 함으로써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 그러나 이런 기회들은 너무나 적고, 우리 대부분은 아무런 대본 없이 조직에 내던져진다. 그러니까 나에게 멋진 사람들은 항상 그런 사람들이다. 해야 하니까, 내 일이니까...오랜만에 그런 이야기라서 좋았다. 멋진 드라마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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