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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Sep 30. 2022

일에서 나를 분리한다는 것

애플tv <세브란스 : 단절>

1. 애플 티비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라는 <세브란스 : 단절>을 정주행했습니다. 아주 독특한 설정에서 시작하는 현대 스릴러물인데요. 보고 있으면 일하는 자아와 삶에 대해 재밌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2. <세브란스>의 설정은 이렇습니다. 극 중 세계에서는 '단절 시술'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대기업 '루멘'에 입사하려면 이 단절시술을 받아야 합니다. 이 시술을 받게 되면 출근하는 순간 출근 전/후의 삶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일터에서의 기억만 남게 됩니다. 가족은 누구였는지. 내 이름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완벽하게 끊기는 것이죠. 우리가 출근하기 싫을 때 하는 상상, '몸을 둘로 나눠서 한쪽만 출근시키고 싶다'의 다른 버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이 시술을 받은 뒤에도 삶이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출근 전/후의 기억과 감정들이 출근 중의 자아들을 무의식 차원에서 계속해서 괴롭힙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회사의 어떤 비밀들이 드러나고, 문제가 생기고, 이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스릴러물이예요. 


4. 저는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일과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노동에 대해서 '노동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부터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진짜 해방이다'라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시각들이 있지만,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우리 대다수가 하루 8시간 이상을 일을 하고, 그 일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아와 삶을 구성해갑니다. 우리 삶에서 일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 중에서는 가장 많은 포션을 차지하는 것이 일이니 만큼 일이 삶에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지요. 



5. 그래서 드라마를 보다 보면 '워라밸'이라는 개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전에 전제하고 싶은 것은 워라밸은 명백히 일이 삶을 잡아먹는 상황에서 나온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 경우에는 '단절'이 아니라 '포식'에 가깝겠지요. 일하는 자아만 남아서 일 외의 모든 것들을 잡아먹고,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취나 보상이 적은 상황에서 착취가 이뤄지는 상황은 여전히 세상에 파다합니다. 


6. 그렇기 때문에 하루 8시간, 주 52시간이라는 것이 최소한의 합의임을 전제하고 워라밸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게 제 입장이기도 하고요. 또 이 시간은 인류가 꽤 오랜 시간 권리확장을 위해 싸우면서 확보한 가이드라인이기도 합니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서 딱 일이 '단절'적으로 이뤄지고 퇴근 후에는 행복해지는 삶이란 건 사실 참 쉽지가 않지요. 어떻게든 일은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제 주변에서도 무조건 8시간만 근무하시는 분들, 혹은 주 4.5일제로 일하시는 분들조차도 일에서의 불만족이 퇴근 후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일에서의 만족이 퇴근후를 홀가분하게 합니다. 단절 시술처럼 on/off를 한다는 것은 정말 보통의 의지가 아닌 이상 어려운 일이지요. 


8. 워라밸이란 결국 어떤 기준에서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의 만족감이 퇴근 후의 삶에도 영향을 줘서 일과 삶 두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삶을 지낼만한 순간으로 만들어 준다는 의미에 가깝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일터는 분리해야 한다'라는 입장과 '일에 자신을 10시간 넘게 내던져서 거기서의 성취감으로 삶을 꾸려야 한다'는 입장 모두 다 워라밸의 진짜 의미를 못 짚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일도 삶의 일부이니까요. <세브란스 : 단절>은 그것을 정말 극단적으로 보여주며 일과 삶이 기계적으로 on/off가 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얘기하는 드라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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