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한국의 능력주의>

by 줄타기인생

1. 젊은 세대의 분석에 있어 ‘공정’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한지 좀 됐다. 그런데 그 키워드를 듣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한 생각. 첫째. 공정에 민감한 게 꼭 젊은 세대의 특징일까? 한국사회 경쟁의 강도는 높은데 다른 세대에서도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둘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슈나 성차별 이슈, 장애인 이동권 등 사회 약자의 불평등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면서, 부자의 독식은 비교적 잠잠하거나 적극 인정하는 여론들을 보면 이걸 과연 공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2. 박권일 씨의 책 <한국의 능력주의>는 이러한 의문에 답하는 책이다. 책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의 최근 이슈는 공정성의 문제다. 그런데 과연 공정/불공정은 이 상황을 판단하는 좋은 키워드일까? 더 공정하게. 더 능력있는 이들을 뽑아서 자원을 몰아주면 되나? 그렇지 않다는 게 저자의 답이다.


3.능력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공정/불공정 프레임은 결국 더 큰 사회 문제인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재생산한다. 극한의 능력주의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타고난 재능과 배경 등의 우연적 요소를 제거할 수 없으니 능력주의는 결코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없다.


4. 근데 여러 조사결과와 이슈들에서 드러나는 점은 한국인은 불평등 문제에는 둔감하다 못해 적극적으로 용인하고. 과정이 불공정하다 판단되는 문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공격적으로 대응해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결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


5. 왜? 한국사회의 경쟁과 부의 편중은 오랜 전통이고 이를 기반으로 능력주의가 한국인의 심성에 강력하게 자리잡았기 때문. 거기에 경쟁이 점점 격화돼 획득 과정에 대한 민감도는 높아졌음에도, ‘능력자’의 독식엔 지나칠 정도로 둔감하다.


6. 예를 들면 계급시험으로 변질된 수능/공채/고시는 여전히 ‘공정한 것처럼’ 위장하고 있고. 이를 통과하면 추가 검증 없이 부를 독식하거나 평생의 지위를 획득하는 시스템은 당연시 된다. 이런 기반에서 불평등의 원인은 개인의 책임으로 간주된다. 몇년을 현장에서 일한 사람도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규직 자격이 없다고 주장되는 곳이니까. 어떤 면에서는 사회 전체가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정유라)’의 정서로 흘러가는 사회이기도.


7. 주장만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와 같다. 책에서는 다양한 조사와 논증을 통해 주장을 펼쳐나간다. 사람들이 공정성에 관심이 있다고 믿거나, 작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끝없는 능력검증이라 생각한다면 원점에서부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만한 책이다.


8. 능력주의가 좋은 원칙인지에 대해 외국에서는 많은 선행 논의가 있어왔음에도 불구, 한국에서는 능력주의 외의 다른 원칙들을 다루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때문에 이제 더 강화된 능력주의(혹은 더 투명한 시험)를 요구하는 대신 불평등 해소의 관점에서 사회문제의 해결책을 고민해보자는 책의 주장은 한국사회의 분열과 갈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읽고 알려볼만한 것이 아닌지.


9. 덧붙여, 예전에 <우리는 왜 괴물이 되어가는가>라는, 유럽사회의 경쟁 격화에 따른 사회와 인격의 붕괴를 다룬 책을 본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 이미 한국에서 90년대부터 격화된 문제를 유럽은 이제 겪고 있구나. 헬조선이 아니라 헬월드구나. <한국의 능력주의>를 읽으면 한국사회는 정말 나쁜 의미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쌍놈의 사회’라고 했는데 사실 그게 현대사회의 본질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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