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패스트 & 필 러브>
1.스포츠 스태킹이라는 취미가 있다. 컵 여러개를 빨리 쌓고 내리면서 시간을 재는 스포츠다. 이 스포츠에 10대때부터 재능을 보였던 주인공 까오는 우연한 계기로 특별히 이렇다 할 꿈은 없지만 삶을 잘 꾸리는 제이와 사랑에 빠진다. 둘은 같이 살게 되고, 세계신기록이 있으면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기에 까오는 세계 신기록 달성을 목표로 제이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러나 10년 동안 이어진 둘의 동거생활에 묵혀놨던 문제가 터지고 둘은 나름의 해결책을 찾는다.
2. 태국 나와폰 탐롱라타나릿 감독의 <패스트 & 필 러브>는 스포츠 스태킹을 소재로 한 코메디물이다. 처음 이 영화의 티져를 보자마자 요요라는 마이너한 취미를 가지고 있고, <족구왕>을 재밌게 본 입장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이런 영화들은 보통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취미에 몰입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마련이고,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온 세계란 그런 곳이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좀 다른, 하지만 균형잡힌 접근을 취하고, 그게 <패스트 & 필 러브>를 더 사랑스럽게 만든다.
3. 까오는 스포츠 스태킹에 엄청난 집념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생활인으로서는 구제불능이다. 그는 빨래도,요리도,청소도 할 수 없고 어떻게 세상이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화장실 개수구에는 원래 머리카락이 없는 줄 알고 있고 전기세를 어떻게 내는 지도 모른다. 그가 잘하는 것은 오직 하나, 스포츠 스태킹을 더 빨리 하는 것이다. 그것 하나를 위해서 제이에게 모든 살림과 결정을 맡겨놨는데, 제이가 자신이 원하는 삶이 단순히 까오의 행복을 지켜보는 일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며 둘은 갈등에 빠진다.
4. 까오의 맹목적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거쳐온 10대 때의 마음과 풍경을 떠올렸다. 극 중 공식 세계신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까오를 계속해서 압박하는 콜롬비아의 스태커 에드워드는 엄마에게 뚱한 표정으로 말한다. “왜 평생 마음껏 컵만 쌓으면서 살 수 없죠?”. "왜 요요만 할 수 없죠?"
5. 까오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스태킹 기록 갱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다. 집에는 항상 소음이 없어야 하고, 식단도 완벽하게 관리한다. 뭐 하나만 거슬려도 제대로 기록을 내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언제나 스태킹만으로 이뤄진 삶을 꿈꾼다. 제이를 사랑 한다고 했지만 사랑을 했던 것 조차도 아니다.
6.우리가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세상에게 한탄한다. “왜 이것만 할 수 없지?” 여기에 대해 영화의 답은 명확하다. 그런 세계는 없다. 그런 건 어린이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니가 다른 무엇인가를 같이 할 수 있어야만, 그러니까 균형잡힌 어른의 삶을 살 때가 되서야만 니가 원하던 그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
7.극 중에서 공식 챔피언은 콜롬비아의 에드워드지만, 실제로는 까오가 가르치는 파이리우가 세계관 최고수다. 그는 까오의 기록인 4.7초도 아니고, 에드워드의 4.699초도 아니고 무려 3.8초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까오가 왜 대회에 참가하지 않냐고 물어보자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진짜 실력이 있으면 뽐내지 않는 법이야" 실력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물으면, 반문한다. 인생에 드라마가 있으면 방해가 되나? “내가 3.8초를 기록했을 때는 옆방에서 부모님이 이혼한다고 싸우고 있었어. 그날은 더럽게 시끄러웠고 혼란스러웠지만 난 연습했고 기록을 냈지. 그때 딱 한번이야” 한계가 있어야 한계를 깰 수 있다.
8.보통 이런 소재의 영화들이 많이 취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아마 까오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인 채로 스포츠 스태킹에서 우승하고, 그것의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일상의 문제들은 어떻게든 해결됐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계속해서 그의 살림을 부각한다. 마치 아무리 니가 세계 챔피언이라고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굴레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은 것 처럼.
9.다행히도 여러 과정을 통해 까오는 살림을 할 줄 알게 되고, 스태킹 바깥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표백된 세계를 위해서 어떤 포기와 희생이 있었는지 직시하게 된다. 그로 인해서 이 스포츠가 작게는 팀 스포츠이자 크게는 모두의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부분을 연출하는 장면은 정말 가슴이 뜨겁도록 아름답고 멋지다.
10. 스포츠 스태킹뿐일까. 요요만 그럴까.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수많은 일들이 우리 자신을 만든다. 우리가 만약 그것들을 외면할 수 있었다면, 누군가가 그 부담을 대신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직시하고 그 일을 나눠 가질 때에만 우리는 진짜 고수가 될 수 있고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다.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정말 어른스러운데, 스포츠 스태킹에 몰입하는 인물들의 마음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이 취미가 얼마나 마이너하고, 어떻게 보면 조금 우스울 수 있는지를 킥킥대면서 찔러댄다. 그리고 해피엔딩으로 흘러가지만, 결코 주인공인 까오와 제이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하나를 얻었으면 하나를 잃는다. 그러나 보는 사람은 그들이 더 성장했고 더 어른이 됐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보고 또 보고싶은 사랑스러운 영화다.
11.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또 하나의 매력은 어린이들이 멋진 역할을 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것은 위에서 말한 스포츠 스태킹의 현실적인 초라함 (어린이들의 취미속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어른들)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지만 주인공의 마음이 얼마나 그 세계에 몰입해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역으로 엄청 진지한 설계이기도 하다.
12. 어린이들이 어떻게 나올까? 위에서 말한 절정 초고수들인 에드워드와 파이리우는 둘 다 10살 내외의 어린이들이다. 그들이 살림도 못하는 한심한 어른인 까오를 상대로 뼈를 때리는 말을 내놓고 그를 훈련시키고, 각성시킨다. 에드워드는 까오를 자극하고, 그의 엄마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어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파이리우는 인생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할때만큼은 그들의 모습이 정말로 멋지게 표현된다. 이 영화 속에서 어린이들은 완성된 존재로 나타난다. 나는 이 장면들이 정말 미치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