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대응의 역설
1. 얼마 전 담당 브랜드의 명절 시즌 판매가 저조해 급한 마음에 클라이언트와 상의 후 평시에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광고를 집행했다. 기한이 정해져 있어 마음이 급하니 가설이나 목표치도 러프하게 잡아서 움직였다. 그리고 결과표를 받아본 순간 깨달았다. 망했구나.
2. 구매 0, 리드 수집도 0, 트래픽 마저도 엉망진창. 마음이 급해 "뭐라도 하자. 그래야 면이 선다"라는 생각에 클라이언트에게 생돈 몇백만원을 쓰게 한 것이다. 나 혼자 몸을 갈아서 나온 결과면 모르겠으나 프리랜서가 되고서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정말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3. 명절이 지나고 리뷰를 해보니 판매가 저조했던 이유가 보였다. 일단 시장 판세가 좋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번 추석, 곡소리 나는 브랜드들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그럼에도 잘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문제는 그게 다 지나고 나서 보였다는 점이다.
4. 무엇이 가능했을까? 광고를 더 다채롭게 준비하고, 프라이싱을 세분화했었어야 했다. 평시 판매가 늘어났고, 시장의 수요가 어느정도 충족된 점을 고려해 이벤트 판매량을 낮게 잡고 물량을 줄이자고 의견을 드렸어야 했다. 다 사전에 예상했어야 하는 일인데 그러지 못했다. 경험이 없던 일도 아닌데!
5.그럼 중간에 이 사항들을 적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당연히 적용했고, 대응했다. 근데 그것만으로는 불충분 / 무성의 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던 게 패착이었던 거다.
6. 이런 모습, 나 말고도 많은 이들에게도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라고 믿어본다). PPL이나 모델이 필요할 것 같은데 쓸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애매한 셀럽을 섭외하고, 양으로 몰아붙인다. 효과가 날 리 없다. 광고비가 남았으니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의미없는 인지/도달/트래픽 광고를 돌린다. 대형이벤트니까 대형 광고를 쓴다. 월말이니까 프로모션을 해야 할 거 같다. 상세든 광고든 뭐든 일단 뜯어고쳐본다. "어쨌든 뭔가 하려고 했다"라는 생각에 맘이 조금은 편해지고 같이 일하는 동료나 상사에게도 면이 좀 선다. 나도 이렇게 일을 한 적이 많고, 지금도 그럴 때가 종종 있다.
7. 이런 노력들은 보통 정신적/인적/물적 리소스를 낭비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상세를 바꿔야 하니 디자이너 리소스가 쓰이고, 기대감이 형성되니 동료들의 정신적 리소스가 쓰이고, 결과가 좋지 않으니 허탈함이 몰려온다. 무성의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니다. "지금 여기서 뭔가 해내지 않으면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라는 책임감에 나온 결과라는 게 더 괴롭다. 예산이 적으면 들어가는 노동력도 적어야 할텐데, 그렇지가 않다. 차라리 그 리소스를 아끼거나 다른 걸 했다면...이라는 본전 생각이 안날 수 없는 것이다. 이번이 그랬고, 돌이켜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꽤 많았다.
8. 때문에 나는 갈수록 뭐든지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잘 안 믿게 됐다. 당연히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는 것의 손실이 클 때는 무엇이라도 하는 게 맞다. 예를 들면 작은 테스트들, 리소스가 크게 들지 않는 시도들, 혼자 해낼 수 있는 일들 등. 하지만 일이 이미 활시위를 떠나서 과녁으로 날아가고 있을 때는? 가만히 있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더 나을 때가 의외로 많다.
9. 하지만 '뭐라도 하자'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으면 주변으로부터 무성의한 사람이라는 의혹을 사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위기가 찾아왔을 때 뭐든 해서 통해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려는 관성이 있고 거기에 대해 "지금은 그냥 기다리고 있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신뢰를 주기는 어렵다. 작게는 방청소부터 크게는 대형 마케팅까지, 어찌보면 사람의 당연한 습성이다.
10. 그렇기에 스타트를 끊고 나면 되돌리기 힘든 업무를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한 순간은 계획과 준비 단계임을 절감하게 된다. 이때 정말 꼼꼼히 잘 해놔야 '해보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11. 물론 사전계획 단계에서도 "뭐든 해보자"의 유혹은 존재한다. 특히 예산이 부족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져있을 때 더 심하다. 남들이 하니까. 그럴싸해보이니까. 왠지 우리는 저비용 고효율을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회사에서 새로운 거 하라고 하니까 등등. 이 순간, 동료간의 합의, 지난 프로젝트 중 효과적인 방식에 대한 명확한 리뷰 자료 등이 있어야만 "이번에는 뭐라도 하자"는 마음을 효과적으로 억누를 수 있다.
12. 계획도 잘 짜고 스타트도 끊었지만 프로젝트 진행 중 "그래도 빨리 뭐라도 해보자"라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그때는 액션의 기대값보다 비용손실을 더 따져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계획되거나 숙고하지 않은 지출이 진행됐을 때 손실은 100%지만 기대값의 확률은 모호하거나 매우 낮다. 이미 손실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고, 돌발 액션의 기대값이 이 모든 손실을 만회할 수준이 아니라면 손실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가장 효과적인 액션이고, 보통 그 액션들은 그렇게 많은 리소스를 요하지 않는다.
13. 오랜만에 느끼는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경험 후, 우치다 타츠루의 <거리의 현대사상>이라는 책을 보다가 이 상황에 딱 걸맞는 구절이 눈앞에 나타났다. '결단'을 '뭐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바꿔도 잘 들어맞는 듯.
-결단은 되도록 안 하는 편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선택지가 한정된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뜻이니까요. 선택지가 한정된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는 것. 이것이 '올바른 결단을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그대가 지금 결단할 때'를 맞이했다면 그것은 이미 너무 늦었다'는 뜻이다. 상황이 그대에게 선수를 친 것이다.
상황이 선수를 치게 하지 말 것, "결단"하지 말것.
여기에 더하자면 상황이 이미 선수를 치고 있다면 다음 상황을 기약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