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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Oct 24. 2017

반쪽의 설계자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을 읽고 쓰다

"민주화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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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베스트(일베)가 한창 사회문제로 주목받기 시작할 때, 광주 민주화운동 비하 발언들과 함께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던 표현을 꼽으라면 바로 '민주화'라는 단어의 사용이 아닐까요. 일베는 산업화를 긍정적인 의미로, 민주화를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며 나름의 세계관을 나타내지요. 좀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들의 세계관 속 한국의 정통성이란 박정희,이승만,이병철,정주영 등의 독재자와 1세대 자본가들에게 있습니다. 일베나 우파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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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독재/민주화를 정통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 누군가 하는 것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민주화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이후 발생한 사건이니 설계라고 하기는 애매합니다. 어떤 이들은 좋은 설계도를 가진 이들이, 나쁜 설계도를 가진 이들에게 밀려난 것이 대한민국의 시작점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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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왠만큼 역사에 조예가 깊지 않다면 알기 쉽지 않은 대한민국의 진짜 설계자들 일부를 드러내는 책입니다. 왜 설계자일까요? 그들의 설계도가 실제로 어느정도 성공했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기초를 닦아놨기 때문입니다. 책이 지목한 그 설계자들은 박정희도, 이병철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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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대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상계> 잡지의 주요 멤버이자 박정희 시절 암살당한 반독재운동의 거두 장준하. 천주교와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던 김수환 추기경, 장준하의 절친으로서 민주화운동의 강력한 지원자였던 김준엽 고려대 총장. 한국 인문정신의 본원인 김수영 시인, 함석헌 등 우리가 소위 '반독재' '민주화'세력으로 배워왔던 이들이 바로 진짜 설계자들입니다. 이들은 한국의 진짜 우파였으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당성과 활발한 활동 덕에 그들이 구상했던 나라의 설계도가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는 것이죠. 지금이야 우파-좌파란 자유한국당-민주당 정도의 의미이지만 좀 더 의미를 따져보면 우파란 민족주의,자본주의를 골간으로, 좌파란 세계시민주의,사회주의를 골간으로 하는 세력을 의미해왔습니다. 사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좌파의 씨가 말랐으니 대한민국을 설계할 사람들은 우파밖에 남지 않았었습니다. 그 중에도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바로 저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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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대다수는 '민주주의'라는 신문물에 열광했던 안창호와 서북파들에게 교육 받은 민주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도 일제에 저항했었던 강력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선배들의 친일경력에서 자유로웠고,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월남까지 한 반공주의자였기에 한국전쟁 이후 빨갱이라는 혐의에서도 자유로웠습니다. 이들은 독립된 민족국가이자 경제,정치,사회,예술 모든 부문에서 민주화와 근대화를 이룬 나라를 구상했고, 박정희 정권 초기까지는 정권에 협력하며 자신들의 구상을 정책에 반영하기도 했습니다. 사회,문화에 끼친 영향이야 말할 필요가 없겠죠. 우리가 지금 산업화-민주화를 마치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이들은 꿈꾸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들의 구상이 실현될 수 있었다면? 역사에서 상상이란 항상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달콤한 유혹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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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수록된 설계자들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곧아서 '한국에도 이런 전통이 있었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역사란 결코 선과 악의 투쟁이 아닌, 복잡한 인간사라는 점을 인물열전들을 통해 전달한다는 점입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강력한 민족주의자이자 엘리트였지만 이는 일본 유학과 신문물의 세례 덕에 가능했습니다. 이들의 반공주의는 당시로서도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많아 이로 인해 정세를 오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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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멸종한 남한 사회에서 그들은 겨뤄볼만한 대적자로서 좌파의 설계자들이 아니라 박정희,전두환 같은 뒤틀린 반민주,반근대 세력과 싸울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빨갱이'로 몰리거나 탄압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이 책을 보면서 '이런 진짜 우파들이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달콤한 꿈을 꿔 보지만 한국전쟁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비극이 있는 한 이들이 복권되도 사회 왼쪽의 자리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진짜 우리가 잃어버린 꿈은 '좌파와 우파의 설계자들'모두의 영향이 남아있는 세상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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