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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Oct 03. 2018

워라밸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이들

일에 대한 전망을 왜 자꾸 개인에게만 묻는가?

는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를 가정해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 8시간만 일하고 퇴근하는 건 도움이 안 된다"라며 “회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나. 그런 상태에서 회사에서 어떻게 개인이 살아남고 또 회사는 어떻게 살아남겠나"라고 말했다.


전준희 디렉터는 일하는 시간을 법적으로 제한하기보다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회사가 망해서 없어질지 모르는데 그렇게 된다면 나의 워라벨이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면서 “프로젝트에 몰두하느냐, 승진에 집중하느냐, 건강상태에 따라 일을 쉬느냐, 가족들과의 시간을 조금 더 보내느냐는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구글이 돌아가는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참....화가 난다. 세상은 고학력자 / 고생산성 노동자 / 구글만 있는 게 아니다. 워라밸에 대해 좀 깨인 사람들이라는 자들, 심지어 구글 출신조차 하는 이야기가 다 이런 식이다. 일과 삶은 분리돼 있지 않다. 8시간만 일하라고 하는 건 좀 이상하다. 그러니까 어떤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기계발을 계속 해서 능동성을 가져라..그러면 일이 전부가 되어도 행복할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사회에서 이런 말들은 상당히 멋져보이지만 사실 워라밸 논의 이전에 일하는 사람을 괴롭혔던 자기계발 이야기들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워라밸은 일차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세대교체와 후진적인 직장문화의 문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할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생계 수단이 없다. 그런데 질 좋은 일자리는 한정돼있다.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사람들 대다수는 그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요컨대 대다수에게 일이란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생계의 수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터가 8시간 노동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건 일하는 사람 대부분에게 별 의미가 없거나,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어떤 이들은 워라밸을 따지는 건 '원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자백이다' 라거나 '불행하게 살 필요가 있는가'라는 문장을 썼지만. 아마 워라밸을 중시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거다. 불행하면 안되냐?  


 교육제도는 인간들을 성인이 되면 자유인처럼 살 수 있는 것 처럼 키워놨다. 그러나 커서 맞딱뜨리는 세상은 자유인의 세상이 아니다. 대부분의 일은 엄청 큰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다. 안정적이지도 않다. 자아실현도 어렵다. 그런데 이 일을 내가 원해야 하거나 이 일을 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 6시에 집에나 보내줘! 일자리가 전망을 주지 못하는 이유를 도대체 왜 일하는 자들에게 묻는가?


 우리 모두가 자아실현으로서의 노동을 하며 살 수 있는 존재면 더할나위 없다. 그러나 그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미션이다. 그 전까지는 인구의 대다수는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하고, 그러한 분업구조하에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이 글에 감명받고 반응하는 이들이 있다면 자기 자신의 노동조건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결국 꽤 괜찮은 노동 조건에서 일을 하거나, 그러한 노동을 꿈꿀수 있는 배경이나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매우 소수다. 근데 이 소수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과잉대표화 돼 있다.

 '대다수는 하기 싫은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는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지 않는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노력의 의미가 퇴색하니까?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누군가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노동은 신성하지 않고 고통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와 정부는 최저임금을 마련하고,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일터 외의 삶의 질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워라밸을 우려하는 말들이 '니가 더 노력하면 더 잘 살수 있어'라는 철 지난 기만의 새로운 버젼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런 조건에서, 앞서 언급한 헬조선의 노동상황을 결합시킨 상황에서 일단 급한 일은 노동시간의 엄격한 규제이다. 마치 자본주의를 벗어났다는 듯 굴며 온당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소위 예술가나 도제식 사업가, 생협 들에 대해서 임노동의 규칙을 강제하는 것이 오히려 그 가치를 높이는 일이 되는 것 처럼 말이다. 52시간 노동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이들은, 마치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꼬집었던 당대 영국의 자본가들, 그러니까 12시간 노동을 8시간으로 줄이면 노동자들이 나태해지며, 회사가 망할 것이고,노동자들 스스로도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발악했던 이들과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물론 인간의 삶은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 근데 그 일은 저런 이들이 말하는 일. 그러니까 임노동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일의 개념이 유적 노동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퇴근 후의 생산성 없는 자아실현의 무엇일 수도 있다. 오히려 일이란 직장에서의 일 뿐이고, 삶이란 퇴근 후의 삶이며, 임노동이 아닌 일은 무가치하다고 보는 편견에 이들이 잡혀있는 건 아닐런지. 어떤 이들은 8시간 불행하고 16시간 행복한 방법을 찾기도 한다-그게 차라리 스마트폰 끼고 뒹구는 거여도!-


 어떤 분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단순한 워라밸이 아닌 '밸런스 라이프'를 지향하는 것은 결국 정시퇴근이 어떤 업무/직장에서든 눈치 안보고 가능해지는 다음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것을 일반화 시켜 이야기 하는 것은 부잣집 도련님들의 철없는 타령과 같을 뿐. 한겨레 안수찬 기자의 청년빈곤 기사를 필수교양문건으로 지정해야 할 판이다. 더 배우고, 더 생산성 높은 일을 하고 있다면, 사회에 대해 더 통합된 시야와 제도와 사회구조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언론을 통해 저런 식의 일반화 논리로서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립된 빈곤 청년을 만나보면, 그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이 공유하는 관념 또는 정서가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게를 차려 장사하는 꿈’을 꾼다. 빵가게, 호프집, 치킨집 등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임금생활자가 되는 길을 가능성에서 제외한다. 대신 소규모 자영업자가 되는 꿈을 꾼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각종 자영업의 기반은 서비스업의 대형화와 함께 붕괴했다. 그들이 일하는 대형마트와 프랜차이즈가 동네 작은 가게를 모두 망하게 했다. 그들이 작은 가게에서 돈을 벌려면 대형마트가 망해야 한다. 그런데 마트와 편의점과 커피전문점이 망하면 그들은 당장 오늘을 먹고 살 돈을 벌지 못한다. 그들의 꿈은 뫼비우스의 띠에 올라 있다.


이들은 종종 “끈기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실제로 그들은 정시에 출근하지 않거나, 너무 쉽게 일을 그만둔다.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반쪽짜리다. 그들로선 성실해야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어딜 가든 그들은 월급 80만~130만원을 번다.


마트·백화점 등에서 판촉 영업을 하는 스물네 살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고등학교만 졸업했다. “전문대를 나와 사무실에 취직해도 커피·복사 심부름하면서 120만원을 받는다”고 그는 말했다. 학력을 높여봐야 소용없다는 것이다.


서울 소재 유명대학을 졸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들의 월급은 매양 그 수준이다. 착실히 공부하여 착실히 대학을 졸업한 뒤, 착실히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를 그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들은 거리를 헤매는 히치하이커처럼 걸리는 대로 아무 직업이나 갈아탄다."
                                                             
                                                   안수찬 : 그들과 통하는 길 - 언론이 전하지 않는 빈곤 청년의 실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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