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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Feb 08. 2019

애인의 숙취해소

1달 넘게 인생이 급격히 노잼모드 됐다. 혼자 곰곰히 생각을 해 보니 일터나 취미에서의 지지부진함이 역시 제일 큰 부분이다. 무엇보다 불과 몇개월전까지 충만했던 '새로운 것을 배우자'라는 의지가 팍 사그러든 것이 이 노잼시기의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게 업무에 관한 것이건 아니면 사생활의 영역이건 간에 무언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고 (책을 읽는 건 제외) 배움에 에너지를 쏟는 것을 자꾸 가성비나 기회비용으로만 생각하는 이상한 습관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배워봤자다..'라는 이상한 패배주의가 내 안을 갉아먹고 있다.

물론 기회비용의 타령은 한정된 시간과 돈을 가진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다 겪는 일종의 성인병이다. 그러나 요즘의 나는 그게 좀...심하다. 그리고 사실 나는 회사를 옮기고 나서 거기서 한동안 벗어날 줄 알았다. 근데 아닌 것이다. 다시 돌아와버린 느낌이 들어서 이 당혹스러움이 가시질 않는다. 이런 상태에 처하면 사람은 이 불만을 가장 즉각적인 행위로 풀게 되는 법이다. 쇼핑을 한다던가. 폭식을 한다던가. 어찌됐건 소비와 소모라는 가장 즉각적이고 강렬하며 내가 '주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심어주는 행위에 골몰하기 마련이다. (같은 이유에서 항상 튀고 싶은 힙스터들은 소비로 해결이 안되는 짓들은 안한다.)

무언가를 해야지...해야지..하면서 집에 오면 또 반복되는 이 지루함과, 배우고 인내하기보다 지르고 조급해하는 이 악순환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애인님의 이야기가 문득 엄청난 힘이 됐다. 정말 사소한 이야기였는데 본인은 숙취가 있는 날에는 회사 점심시간에 에머이에 가서 쌀국수를 하나 시키고, 거기에 매운 고추를 팍팍 쳐서 한그릇 비운다는 거다. 그러면 진짜 속이 싹 풀린다고...근데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너무 좋아서 웃었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특히 그게 사랑하는 사람의 의외의 면이라면 더 그렇지. 내가 아는 애인은 그렇게 숙취에 시달릴 정도로 술을 자주 먹는 사람도 아니고. 베트남 음식같은 이국의 음식을 잘 즐기는 사람도 아니다. 회사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만 그런 디테일한 모습은 잘 상상해보지 못했는데, 그저 내가 몰랐던 애인의 모습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좋고 그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터진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애인님이 리라쿠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 있다).

진짜 그 이야기 들은 날, 하루종일 애인의 그 숙취해소 장면을 혼자 상상하며 웃었는데, 그게 좀 지나고 보니 그 이야기가 맘에 남고, 힘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몰랐던 모습을 아는 것이 이렇게 재밌고 힘이 나는 일인데. 6년 7년을 사귄 이 사랑도 아직 이렇게 새로운 게 많은데 말이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렇다면 내가 닿지 못한 나의 다른 삶의 모습이나 가능성을 좀 더 열심히 찾아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조금 억지스럽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의지로 노잼을 이겨내는 삶. 전에 올린 글과는 조금 배치되지만 그래도 가장 많은 생각을 하고 가장 많은 행동을 해야 하는 이 시기가 뭔가 너무 아까우니까. 이렇게 글을 써 보면서 의지를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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