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무용지물

'주공아파트 거지'가 '휴거'가 될 동안.

월급쟁이 단상

by 줄타기인생

보급형 아파트에 사는 저소득층 아이들을 놀리는 일은 그 맥락만 놓고 보면 새로운 일이 아니다. 90년대 초중반, 진보적 색채의 동화를 많이 출간했던 산하 어린이 문고의 동화를 보면 주공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놀림받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아마 아파트의 주거격차가 생긴 뒤에 이런 종류의 차별화가 계속 존재해왔을 테다. 그리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저런 단어를 직접 가르쳤다기보다는. 음으로 양으로 묻어나오는 어른들의 태도를 보고 아이들이 스스로 세계관을 형성했을 가능성도 클 거라 생각한다. '거지'라니. 얼마나 아이다운 비난인가.


물론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에 놓여 외부의 자극에 약한 어린아이들이 자극적이고 차별적인 단어를 쓰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처음으로 욕을 아무 거리낌 없이 썼던 순간을 생각해보자) 이상한 어른은 많고 그 영향을 받은 이상한 아이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너무나도 눈에 띄기 쉽다.


아이들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결국은 그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줄 합리적인 권위자나 롤모델 혹은 사회 윤리가 있는가가 문제다. 지금은 사회에 그런 게 없다. 윤리가 없는 게 윤리다. 왜냐면 옳게 살아봤자 결과가 눈에 너무 뻔히 보이고 어른들은 (말은 어떨지 모르지만) 실제로 적자생존을 넘어서 적자=선의 시대에 산다. 잘 사는 사람들은 계속 잘 살고. 심지어 성품마저 넉넉해 보인다. 잘 사는 이들은 뭘 해도 되기 때문에 못 사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거나 거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90년대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더 전면화됐다는 이야기다. 과거를 미화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이제는 더 염치가 없어졌다.


옳게 사는 것 조차 돈이 좌우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해서 계급을 뛰어넘어 화합하는 이상을 실현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일찍부터 다른 그룹을 형성한다. 중학교때부터 그룹은 갈리고 이런 환경에서는 하위그룹이 학습동기를 부여받기 어려워진다. 안좋은 결과는 자연스레 노오력의 문제가 된다. 좋게 봐줄 이유가 없다. 부모가 제대로 된 윤리관을 가르쳐주지 못하면 학교라도 해줘야 하는데 학교라고 그걸 해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나마 그 역할을 해줄 집단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전교조는 무력화된 지 오래다. 그러니 돈 받는 학원이 그런 걸 해줄 리 없다. 하다못해 '그런 사고를 가지게 된 게 불쌍하다'라고 측은해할 여지조차 없다. 뭐가 불쌍한가? 잘 먹고 잘 살고 배려 따윈 없어도 되는 삶을 사는데 말이다.


사람에겐 경제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라던가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대하는 건 나쁘다.라는 말을 '설득력 있게' 해줄 사회적 사건이나 인물이 없다. 아마 아이들 스스로 저런 생각을 고칠 기회는 갈수록 더 희박해질 것이다. 그 사회의 끝이 어떨지는 너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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