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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욱 Aug 08. 2023

보호수 여행

23년 8월 여름휴가의 단상


        인명을 앗아간 잔인한 폭우가 지나가니 무더위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폭염이 계속된다. 요즘 기후도 사람도 폭이란 글자가 앞에 붙는 상황이 자주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고 또 애잔하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이 계절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막막하고 아이들과 함께 야외활동을 하기엔 엄두가 나질 않아 결국 휴가기간 내내 부모님 댁에 내려와 가족들과 함께 쉬었다. 그래도 명색이 일 년에 한 번뿐인 여름휴가인데 사진을 좀 찍고 싶어 카메라를 챙겨 왔다. 무엇을 찍을지 고민하다가 예전에 정리해 둔 본가 주변의 보호수들을 찾아 동선을 계획해 이틀간 둘러봤다. 햇빛아래에서 차마 100미터도 걷기 힘든 뙤약볕 아래서 이동이 쉽지 않았으나 오랜 시간을 품고 있는 나무들을 만나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잠시 휴식과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임난수 은행나무_천연기념물

연기면 세종리 88-5번지




작년 5월에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암수 한쌍의 은행나무 노거수. 거리가 멀지 않아 부모님 댁에 올 때마다 시간을 내서 들르는데 때가 맞지 않아 아직 노랗게 물든 모습은 보지 못했다. 암나무보단 수나무가 나무 둘레가 더 굵고 수관이 여러 방향으로 넓게 퍼져있어 더 웅장한 느낌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거대한 나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아야겠다고 광각렌즈를 가져가 멀리 떨어져 촬영하곤 했는데 나무가 전해주는 세월의 무게감이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 나무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러 번 만나서 가까이에서 이야기해 봐야 그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날은 평소보다 시간을 더 들여 나무를 관찰했는데 나무의 몸통을 덮고 있는 두꺼운 껍질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의 수피에는 영겁의 시간이 아로새겨져 있다. 가만히 집중해서 응시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와 나무껍질 사이 공간의 스케일이 모호해지면서 나무껍질이 아주 거대한 땅덩어리처럼 보이는데 그 전환의 순간이 꽤나 기분 좋다. 수백 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불규칙하며 아름다운 패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간다. 





쌍류리 느티나무_보호수

세종시 연서면 쌍류리 471 근처





사람의 인생도 그렇지만 나무의 일생 또한 볕 들 날이 있고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보호수는 좋은 생육상태를 유지하면서 아직 남아있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고 있었고, 일부는 마을의 인구가 너무 많이 줄어서일까 조금은 방치된 느낌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쌍류리의 보호수 느티나무는 무려 고려시대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 보호수 중에서도 8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는 흔치 않은데 수령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진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주변의 잡초와 잡목을 정리하고 사람이 나무 가까이에 올라가 볼 수 있는 계단만 있어도 훨씬 나을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겨울에 다시 찾아 잎이 없을 때 정확한 수형을 확인해보고 싶다.




용암리 느티나무_보호수

세종시 장군면 띠실신산길 146






예전부터 한번 보고 싶었던 나무였는데 가장 더운 올해 여름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진으로 처음 봤을 땐 두 그루의 나무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두 갈래로 갈라진 하나의 큰 나무였다. 지금도 정월 열 나흗날이면 용암리 띠울 둥구나무제란 마을 제사를 통해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는데 제사를 지낼 때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했다. 보호수는 오랫동안 존재해 온 자연물 그 자체로도 귀하지만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소통하며 애환을 나눌 때 마을을 수호하는 나무로써 진정한 의미가 생겨나는 것 같다. 다행히 새마을회관 앞에는 75번 마을버스가 다니는데 여름날 먼 길을 달려온 버스는 내리는 손님, 타는 손님 없이 정류장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음 정류장으로 떠났고 나도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용현리 느티나무_보호수

세종시 장군면 용현리 67-2





용암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용현리, 버스정류장 옆에 느티나무 보호수가 한그루 있다. 지난겨울 잎이 없을 때 처음 봤는데 잎이 없음에도 나무가 주는 무게감이 남달랐기에 이번에 다시 한번 찾아가 봤다. 한여름 푸른 옷을 두르니 확실히 나무의 덩치가 더욱 커 보인다. 수령이 550세 정도라고 하는데 왠지 그보다 더 오래된 나무들보다 몸통도 훨씬 굵고 커서 실제로는 나이가 훨씬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육 상태도 좋아 지지대 하나 없이 굵은 가지들을 잘 유지하고 있는데 만약을 대비해 왼쪽으로 뻗은 가지는 지지대를 더해주면 좋을 것 같다. 지금 내 사진으로는 나무가 갖고 있는 세월의 무게가 잘 표현되지 않아 아쉽다.




와촌리 느티나무_보호수

세종시 연서면 와촌리 1270-4





점점 사람이 떠나고 있는 마을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수백 년 수령의 마을 나무를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사진을 찍으며 마을을 걸어보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떠나는 청년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된다. 인구가 과밀한 서울과 소멸을 걱정하는 지방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각 지방의 개성을 살린 관광 콘텐츠의 개발이 거의 유일한 답일 것 같은데 지역별 스토리텔링과 디자인 역량의 개발, 내재화가 그 첫 번째 단추라 생각한다. 한 때는 일본의 디앤디파트먼트나 츠타야와 같은 모델이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빠르게 감소고 있는 한국, 특히 지방의 인구와 소비력을 생각하면 그 또한 답이 아닌 것 같다. 국내 디앤디파트먼트 매장이 서울과 제주에만 상설 매장이 생겨나고 결국 일본처럼 각 지방마다 활성화되진 않았는데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가가 아닌 콘텐츠 기획자이자 마케터로서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있으나 실제로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서 작동하게 만들기 위해선 결국 프로젝트 매니저의 끊임없는 몰입과 적정규모의 투자가 필수다. 잠시 마을에 여행을 왔다 떠나는 일개 사진작가가 논하기엔 너무 큰 이야기인 것 같아 이만 적당히 줄여야 될 것 같다.



카카오맵에서 동선을 정리해 보니 차로 이동할 경우 약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코스다. 나무를 둘러보는 시간까지 합치면 대략 2시간에서 2시간 반정도. 나무 주변에 유명한 맛집이나 카페가 있는 건 아니지만 - 찾으면 당연히 있겠지만 - 인간의 생에 비하면 무한히 길게 느껴지는 세월을 버텨낸 나무가 주는 안정감 그 자체로 여행의 포인트이자 훌륭한 위안이 되었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무자비한 더위 속에서 더욱더 짙어지는 녹색 잎사귀도 괜히 이번 여름을 잘 이겨내고 가을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처럼 느껴졌다다. 우리는 흔히 주변의 자연이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우려하던 기후 재앙은 현실이 되어버렸고 노거수 또한 점점 강력해지는 여름의 태풍 한 번에 뿌리째 뽑히거나 부러질 수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귀한 나무들이 태풍 카눈에 피해 입지 않고 우리와 함께 이번 여름을 무사히 건너길 바란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의 하루하루가 물 흐르듯 부디 잔잔히 흐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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